1975년 10월 3일 베트남 사이공시(현 호치민시)의 한 아파트. 4월 30일
월맹군의 구정(舊正)공세로 패망한 베트남을 떠나지 못하고 5개월여 동안
연금상태에 있던 이대용 전 주월남(베트남) 공사 등 3명의 대사관
원들을 찾아 베트남군이 들이닥쳤다. 그 중 30대로 보이는 베트남인이
불안한 눈빛의 한국인들을 향해 유창한 한국말로 문서를 읽어내려갔다.
"이름 이대용(李大鎔), 직업 외교관, 베트남 혁명사업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한다…."
그로부터 27년 뒤인 6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 서울남서로터리클럽 총회가
열리기 전 클럽 회원인 이대용(78) 전 베트남 공사가 이날 총회
초대연사로 참석한 즈엉 징 특(61) 주한 베트남 대사와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이 장군님, 정말 반갑습니다. 안부가 궁금했었습니다.”(특 대사)
특 대사는 육사7기 출신에 6·25에도 참전한 이 전 공사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이 전 공사)
특 대사가 바로 1975년 이 전 공사를 체포하고 이후 조사에 참여했던 그
베트남인이었다.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를 나와 외교부 소속이던 특
대사는 75~79년 주 북한 베트남대사관에 파견된 데 이어 92~96년 주 북한
베트남대사를 역임한 뒤 작년 7월 주한 대사로 부임했다. 두 사람은 고작
두 번 만났지만 인연은 질겼다.
이 전 공사는 "악연이었어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 좋은 인연으로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웃어보였다. "서로 나라를 위해 일하다 그리
됐는데, 개인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지요."
80년 초 석방되기까지 5년 동안 사이공 인근 치화교도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던 그는 특 대사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향하라는 특씨의 권유를 거부했죠. 죽을 각오로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외교관이라 고문당하지는 않았지만 297일간 햇빛없는
지하독방 생활을 견뎌야 했어요. 78㎏이던 몸이 40㎏대로 빠졌습니다."
그는 당시 쓰던 낡은 가죽 혁띠도 보여줬다. 얼마나 그 생활이 치가
떨리는지 그는 92년 베트남과 국교가 정상화된 뒤 남들 다 다녀오는데도
베트남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특 대사는 이 전 공사의 '저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작년
부임 직후에도 이 전 공사의 안부를 물으면서 '최고의 애국자'
'존경하는 외교관'이라는 호칭을 붙였다고 한다.
특 대사는 "이제 세상이 바뀌어 한국민 전체가 우리의 벗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 공사의 손을 잡고 "세상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죠"라며 "앞으로 자주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한국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베트남이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