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촬영 초기 어느날. 부산 L호텔 어느
방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난 유리창을 뚫고 떨어져 죽을
생각을 했었다. 그날 밤새 호텔 로비에서 촬영한 씬 때문이었다.
강수연씨의 상대역이었던 남자 연극배우는 완전히 굳어서 연기하는
방법을 갑자기 까먹었고, 내가 짰던 콘티는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았고,
데뷔 감독인 나는 그런 상황을 침착히 타개하기는 커녕 우왕좌왕했다.
새벽 영업시간에 맞춰 촬영은 끝냈지만 호텔에서 특별히 제공한 방에서
난 정말이지 투신자살하고 싶었다.
그 후 촬영기간 내내 난 거의 매일 밤 가위에 눌렸던 것 같고 그때마다
다짐했었다. "오케이! 초반 촬영분은 엉망이다. 하지만 그건 전체의
30퍼센트다. 나머지만 잘 찍어도 난 살아남을 수 있다. 잘 하자,
상수야!"
난 편집실 가는 걸 두려워한다. 가기만 하면 우울해지고. 왜냐하면 내게
편집실이란 내가 얼마나 영화를 못 찍는지 확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편집실에선 촬영 현장에서 낸 '빵꾸'를 매우는 일을 한다.
'처녀…'의 경우 어찌어찌 '빵꾸'를 다 매우고, 영화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는 확신이 서고서야 비로소 난 감독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안도했다. (참고로 밝혀 두자면, 문제의 호텔 로비 장면은 결국
편집 과정에서 완전히 삭제 되었다)
영화는 그해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특히 영화를 찍었던
L호텔에서는 특별 시사회가 있었다. 부산의 악명높은 교통난 때문에 나는
초대에 늦었지만 수백명의 손님들이 기다려 주었고 상영전 난 그들
앞에서 연설까지 한 기억이 있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교만하기 짝이
없는. 아, 부끄러워라.
두번째 작품 '눈물'을 찍을 때 나는 데뷔작과는 달리 여유있고 맘 편히
작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촬영 기간 내내
여전히 '이렇게 찍어서 영화같은 영화가 만들어질까' 하는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에 놀랬다. 이제 난 세번째 작품 '바람난
가족'의 촬영개시를 코앞에 두고 있다. 글쎄, 이번엔 맘 편히 여유있게
찍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저 그 걱정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또 그것들을 즐기면서 찍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그럴만한 때도 된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