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대구 실내체육관에서 이우재 울산 모비스 코치가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프로농구판의 최고령자 ’로, 24세 아래인 최희암 감독을 ‘보좌 ’하는 그는 “좋은 사람을 키우고,좋은 책을 남기고 싶다 ”고 했다.<br>/大邱=<a href=mailto:jw-lee@chosun.com>이재우기자 <


정장을 말숙하게 빼 입고 팔장을 낀 채 묵상하듯 서있는 모습이 '코트의
이방인' 같았다. 지난 5일 대구 실내체육관에서 만난 '프로농구 현장의
최고 원로' 이우재(李宇載·71)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프로농구단 코치.

격하게 달궈진 경기장 벤치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판정에 항의하는 그의
몸짓은 볼 수 없었다. 감독·선수와 귀엣말을 속삭이고 메모를 하거나,
손가락을 펴 작전을 지시하고 손뼉을 쳐 선수들을 격려할 뿐이었다.

"감독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할 일이오. 같이 악쓰고
펄펄 뛸 수야 있겠소? 그저 분위기 맞춰 주고 토닥거리다가
감독·선수에게 요점만 짚어 주는 게 내 역할이요."

나이로는 최희암(崔熙岩·47) 감독보다 12간지(干支)를 두 번 앞선
띠동갑, 대졸 신인 선수들보다 반세기쯤 오래 산 노장(老將). 30대
감독들이 활약하는 농구판임을 감안하면, 선수들로부터 '파파(Papa)'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하다.

"60년을 농구 했는데 서로 다 통하는 것 아니오. 어린 선수들과 호흡
맞추는 데도 문제 없어요." 현대전자 프로농구단(현 KCC) 기술고문을
6개월간 지낸 뒤, 2년 공백을 거쳐 복귀한 코트. 그는 스스로 '프로
초년병'이란 생각으로 뛰고 있고, 경기 중 흥분을 가라 앉히는 게
여전히 힘든다고 했다.

이날 적지(敵地)에서 펼쳐진 동양 오리온스전(戰)을 앞두고, 그는 아침
일찍 인터불고 호텔 자신의 방에서 거북이 모양 향대(香臺)에 향초를
꽂아 피우고 백팔배를 올렸다. "언제 그만 두어도 섭섭치 않은 나이
아니오. 삶과 건강과 좋은 친구를 주시고, 이 나이에 이런 바쁜 일까지
주셨으니 만사가 고마울 일 아니겠소." 독실한 불자(佛子)인 이 코치는,
매일 아침 향불이 다 탈 때까지 30분간 하는 자신만의 의식을
'은덕(恩德)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농구에 완전히 미쳐 버린 남편 잘 되라고 서울(일원동)에 혼자 사는
아내가 보약도 지어 주고 매일 불공도 드려요. 네 딸 모두 출가해 잘
사니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코치는 '장수(長壽) 지도자'이긴 해도 불행한 시대를 산 '불운한
선수'였다. 경복중·고를 나와 고려대에 진학한 '슛이 매운'
단신(173㎝) 포인트 가드였지만, 대학 2년 때 6·25가 터졌다. "운동이
다 뭡니까. 부상·수술까지 겹쳐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었고, 남들
4년에 졸업하는 대학을 8년 다녔어요." 그는 제대 후 복학해 '재학생
코치'로 한 맺힌 코트에 다시 섰다.

그는 광신고·경기여고·수도여고 등 여러 학교에서 감독을 맡은 뒤,
82년부터 99년까지 대만·말레이시아·일본에서 지도자로 외국 생활을
했다. 말레이시아·일본(여자)에서는 각각 대표팀의 감독과 기술고문으로
일했다.

"생애 가장 후회하는 게 조건(대우)을 보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거요.
농구(운동)로 사람을 기르고 사람을 남겼어야 하는 건데…. 차라리
국내에서 일찌감치 자리잡을 걸 그랬어요."

이 코치는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했다. 술은 소주 석 잔이 다지만, 담배
한갑반 이상에 원정이 잦은 떠돌이 생활에도 건강은 끄떡 없다고 했다.
"헬스장에서 하루 15분씩 빼먹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경기가 없는 날
5~6시간 연습 중에도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큰 병 앓은 적이 없고, 경기
중 이를 악 다물어 틀니를 한 것 외에는 성치 않은 곳도 없어요."

그의 또 다른 건강 비결은 '바쁜 생활'인 것 같다. 미
프로농구(NBA)라면 AFKN·NHK·케이블 방송을 가리지 않고 보았다가
자신의 파일에 꼼꼼히 옮겨 적는다. 국내 다른 팀들의 장·단점을 직접
컴퓨터를 이용해 글로 정리했고, 다른 한편 코트 그림판엔 스탬프로 찍고
선수 등번호를 적어 넣어 공격·수비 대형을 그려 놓고 대응 요령도
메모해 두었다.

이 코치는 '슛의 달인'으로 통한다. "손가락마다 힘을 주는 정도가
달라야 하고, 손목·팔의 각도까지 합하면 슛의 정확도를 가늠하는
요소가 40가지는 됩니다. 선수 특성에 맞춰 그런 요소들을 다시 맞춰
줘야 해요." 외국어에 능해 외국인 선수와의 의사소통이 능하다는 점도
그를 현장에 복귀시킨 요인이다.

그는 1차 라운드가 끝나면 소속팀 선수들의 특징과 장·단점을 정리해
개인에게 나눠 주겠다고 했다. '죽더라도 무엇 하나 남겨 놓고 싶어'
현재 '농구 용어집' 저작을 마무리 중이고, 발간하면 농구인들에게
거저 나눠 주고 싶다고도 했다. 97년 일본에서 낸 책 '배스킷 볼 레벨
업'은 3만5000부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 코치는 "소질 많은 선수보다 먼저 '사람'이 되야 하고, '깡통'
소리 안 듣게 공부도 열심히 해야 돼요"라고 했다. "농구도 하나의
학문이오. 하려면 제대로 파야 하는데 승부에만 집착해서…. 일부
선수들이 '뒷거래 했다' '의리 없다' 같은 고약한 소리 듣는 게
안타까워요."

이 코치는 돈을 좇지 말고, 한 길을 가도 자기만의 기술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저만 해도 농구 인기가 지금보다 훨씬 못할 때 흥미를 잃지 않고
붙잡았거든요. 인생이건 코치 일이건 시행착오의 연속이고, 같은 실수가
다시 없도록 하는 데 승부가 걸린 것 아니겠어요."

이날 경기에서 이 코치의 소속팀 모비스는 접전 끝에 1점차로 졌다.
"괜찮아, 아직 많이 남았잖아." 그는 아쉬움 속에 코트를 나서는
선수들의 땀에 절은 등을 툭툭 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