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20일 동산고등학교 대강당. 인천의 내로라 하는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남녀 학생들로 신축 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 초청으로 애국가의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지휘자인 안익태 선생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천 무대에 섰던 것이다. 연주곡은 한국환상곡. 장엄한 하모니, 신들린 것 같은 지휘, 고매한 기품에 청중들은 내내 숨을 죽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천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것은 1885년 무렵. 선교사 아펜젤러 부처가 내리교회와 영화학당에서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교회나 학교 밖에서 본격적인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처음 배운 사람은 박흥성이었는데 1923년 활동사진관 '표관'(瓢館)에서 무성영화의 배경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의 후배로 한국농아악단의 창설자 김흥산, 작곡가 김기현이 있었고, 난파 선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임종성·원종철, 동경 유학파 작곡가 최순룡, 성악가 김순룡, 평양숭실전문 출신 작곡가 최성진, 이화여전 출신의 소프라노 김정순, 피아니스트 서후덕·장보원 등이 시기에 활동했다.

광복 후 1947년 인천관혁악단이 인천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소재) 에서 김생려 지휘로 창단 연주회를 가졌고, 1950년까지 5차례의 연주회를 열었다. 1958년 내리교회 성가대가 최영섭 지휘로 우리 나라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것도 특기할 일이다. 모든 게 열악한 당시였다. 그러나 음악회만은 자주 열려 성악가 백석두·양윤식·조명숙·장익상, 바이올리스트 신현담·박상만·이재현·홍훈표, 첼리스트 홍경표·양재표 등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전후인 1953년 육군 경기지구 정훈관현악단이 발족돼, 생활이 어려웠던 음악인들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64년 11월 이들 중 홍훈표·강춘기·염태원·김중석·김형석·손관수·정흥일·김광식 등이 위원회를 만들어, 인천시립교향악단(이하 인천시향)의 모태가 된 인천필하모닉관현악단을 조직했다. 9차 연주회를 가진 후 1966년 5월 인천시향으로 정식 발족했다.

최근 인천시가 경제 특구 지정 축하 신년음악회를 열었다. 금노상 씨가 지휘하는 인천시향 이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고,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필자는 이날 ‘인천환상곡’을 들으며 문득 40여년전 안익태 선생의 '한국환상곡'을 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가난했지만 열정적이었던 인천의 음악인들과 후원자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한 도시의 문화 수준은 곧 그 도시의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준과 같다”는 말을 새삼 되새겨 보았다.

(광성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