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오면 네티즌들이 부시시 눈을 뜨고 일어나 좀비(zombie:주술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신)처럼 떠돌기 시작한다. 그들을 깨운 마법사는
소설가 이영도. 주문(呪文)은 팬터지 소설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이다. 소설이 PC통신에 뜨는 오전 1~2시면
사이버 공간을 배회하다 주문이 풀리면(즉, 소설을 다 읽으면) 잠자리로
돌아가는 이 '새벽 독서가'들은 스스로를 이영도의 주술에 걸린
좀비라고 부른다.
이영도가 팬터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황금가지 펴냄)를 들고 다시
추종자들 앞에 섰다. '폴라리스 랩소디'에 이어 2년 여 만에 선보인 네
번째 장편. 2002년 3월 14일부터 8월26일까지 PC통신 하이텔에 '야밤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다.
파장은 심상치 않다.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 예스24와 알라딘에 배포한
이씨의 사인본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 치열한 확보전이 벌어졌다. 200부가
발매 3분 만에 동나자 부랴부랴 150부를 추가로 내놓았지만 이 역시
순식간에 없어졌다. 인터넷 서점들에는 수십 개의 독자 서평이 경쟁하듯
한꺼번에 떴다.
매니아들의 열광에 정작 이씨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소설은 이외수와
전인권을 합친 듯한 이 장발 청년을 '칩거'의 일상(그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에서 대중 앞으로 끌어냈다. 11일 오후 이씨의 경남 마산
집을 찾았을 때도 그는 "소설이나 볼 것이지…."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인터뷰 중간, 서울의 한 대형 서점으로부터 저자 사인회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비행기를 싫어하는 그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난감한
눈빛이 흐른다. 거실에서 서성이던 그는 "내 놀이터로 가자"며
집필실로 들어갔다.
그는 '습관적 글쓰기 환자'이다. 97년 '드래곤 라자'를 연재할
때부터 한 번 시작하면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을 거의 매일 띄우는
강행군을 한다. 적어도 6개월을 그렇게 버틴다.
"여기가 책 읽고 게임하고 '두드리는' 제 놀이터입니다. 소설 쓰기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재미로 쓰죠. 그러니까 PC통신에 먼저 올리죠."
소설쓰기보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즉시 자판 두드리기를 멈춘다.
'눈새'('눈물을 마시는 새'의 약칭)를 연재중이던 지난해 6월, 그는
월드컵에 빠져 연재를 잠시 중단했고, 황당해진 그의 독자들은 "빨리
재개하라"는 항의 메일을 쏘아댔다.
황금가지 장은수 편집장은 "눈새 1판 1쇄 제작 과정에서 실수로
책갈피용 끈을 넣지 않아 급히 2쇄를 다시 찍었는데, 오히려 끈 없는 1쇄
책이 희귀본 대접을 받으며 수집 대상으로 뜨고 있다"고 귀뜸했다.
고유번호까지 붙였던 '폴라리스 랩소디'의 가죽 양장 한정본은 7만원
정가를 훌쩍 뛰어넘어 두 배 가까운 웃돈이 붙었다. 이씨는 "매니아
상대 마케팅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팬터지 작가"다.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소재를 어떻게 구하고 취재는 언제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인터넷 서핑으로 세상과 만난다"고 말했다. 이
총각(72년생)은 당분간 독신 상태를 면키 힘들 것 같았다.
●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는
-- 왜 밤에 글을 올리나.
"모뎀을 쓰던 시절, 통신 과부하를 피해 밤에 올리던 게 버릇이
돼서…."
-- 서양 중세 분위기 일변도였던 기존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도깨비'
같은 한국적 소재와 순 우리말을 많이 썼다. 한국적 팬터지, 혹은
'이영도식 팬터지'를 위한 시도인가.
"여러 작품을 동시에 구상하고 플롯도 미리 짜놓고 글을 써가다
'재미있겠다' 싶은 것 하나를 골라 연재한다. 따라서 여러 구상 가운데
우연히 선택된 것이고, 다음 번에는 다른 방향일 수 있다."
-- 소설 속에 특정한 수가 자주 쓰이고 있던데, 어떤 의도를 갖고 있나.
"그건 내가 독자에게 제안하는 게임이다. 이번 소설에는 '6', '22',
'6217' 같은 수를 반복해서 보여줬다. 이때문에 사이버상에서 '이번
소설은 62회까지 연재된다'는 쪽과 '88회로 끝난다'는 논쟁이
있었는데, 나는 62회로 끝냈다. 재미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