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용사골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
내려다보는 길을 굽이굽이 지났다. KBS 1TV 드라마 '무인시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땐 날이 맑게 개어 있었다. 수려한 산세 앞엔 거대한
궁궐이 펼쳐져 있다. 고려 깃발이 너울대는 이곳이 바로 2003년
'무인(武人)열풍'을 뿜어내는 진원지다.
말랑말랑한 드라마들이 안방을 점령하고 있는 요즈음, 무인들의 선전은
눈에 띈다. 사극으로서는 드물게 시청률 20%를 훌쩍 넘겼다. 지난 13일
서인석(이의방 역)·김흥기(정중부 역)·이덕화(이의민 역) 등
'무인시대'를 이끌고 있는 무인 3인방을 만나봤다. 이들은
"무인시대를 보면 '현실 정치'가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 4년만에 막 내린 이의방의 공포정치
“형님, 행여나 매관매직은 생각도 마시오.”
이의방은 말 위에 올라탄 형 이준의(김동현)를 쏘아보고 있었다. 같은
대사만 벌써 여섯번째다. 한번은 인근 예천공항에서 비행기가 떴고 또
한번은 말이 움직이질 않았다. 머리가 덥수룩한 신창석 PD는 "흰 모자
쓴 놈 누구냐, 카메라에 현대물 걸리지 않게!"라고 소리질렀다.
한 장면 촬영이 끝나고 서인석은 뜨거운 홍차를 받아들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26㎏에 달하는 무거운 갑옷이 저벅저벅 소리를 냈다. 서인석이
맡은 이의방은 1170년 견룡행수(牽龍行首)로서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키는 인물. 그야말로 '무인시대'를 여는 무신정권의 첫
집권자다.
"권력을 잡게 된 이의방은 초심(初心)을 버리고 딸을 태자비로
입궁시키는가 하면 공예태후의 동기를 겁간하기도 합니다. 결국엔 4년
만에 처참한 시신이 되어 저자거리에 내걸리게 되지요."
◆ 아들과 사위의 부정부패로 망한 정중부
사진 촬영을 위해 미리 분장을 한 김흥기는 수염이 자꾸 바람에 날리는
바람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는 무신정변 당시 최고위 계급인
'상장군'답게 등채(지휘봉)를 나른하게 흔들었다. 촬영보다 촬영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고 지루해 보였다. 정중부는 1170년 '보현원의
참살'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인물이다.
"누구나 신분상승의 욕구가 있잖아요. 차별 대우에 억눌렸던 무신들이
투쟁해나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서민들은 속이 후련하죠.
대리만족이랄까요."
김흥기는 '무인시대'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한 듯 했다. 지난해
11월 정중부 역을 제의받았을 때 잠시 집을 떠나 고려사 책에 매달렸을
정도. KBS 1TV '용의 눈물'에선 정도전을, '제국의 아침'에선 왕식렴
역을 맡았던 '사극의 달인'답다. 정중부는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일가족이 몰살되는 운명을 맞는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아들과 사위가 부정축재로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정중부의 노비가 관리들을 구타할 정도였답니다.
그러니 몰락할 수 밖에요."
◆ ‘치맛바람’으로 무너진 이의민
이의민 역을 맡은 이덕화는 촬영장에서 스스로를 '지킴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의방의 뒤만 지키고 있다는 뜻에서다. 아직은 이의방의
'오른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그를 찾으면 "예이~
'지킴이' 갑니다"라며 달려간다.
그래도 이의민은 극 중에서 그만큼 '길고 오래' 간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병을 핑계로 고향에 은거해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후에야 권력을 잡는다. 경대승 역은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이고
보면 그는 확실히 '장수'할 운명이다.
"이의민이 권력을 잡으니까 뇌물과 청탁이 쏟아집니다. 천노에서
최고권력자의 부인이 된 최씨는 개경에 '치맛바람'을 일으키지요.
이의민보다 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이의민은 결국 최충헌의 칼에 목이 떨어진다
역사소설 '고려 무인이야기'를 쓴 이승한(46)씨는 드라마
'무인시대'에 대해 "고려 무인 이야기는 군사독재 정권을 미화할
우려가 있어 금기시 돼 왔던 소재"라며 "소외계층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야 하지만 군사독재가 아름답게
그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