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로우 블랙잭'(서울문화사)이란 만화가 있다. 제목만 보면 몇 장의
카드로 21이라는 숫자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어느 도박과 요지경
같은 카지노를 연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제목이 주는 선입관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존재한다. 줄거리
위주로 건조하게 요약하면, 이 만화는 일본 최고의 의과대학을 나온
인턴(연수의)과, 그가 대학병원에서 겪게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의학 드라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단순히 소재 중심의 장르만화가
아니라, 일단 책을 잡은 독자들의 눈길을 잠시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휴머니즘의 가치와 일본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 매력적인 그림을
통해 칸과 칸마다 그려진다.
2권까지 번역된 이 작품의 작가는 해양 구조만화 '해원'으로 이름난
일본의 사토 슈호. 그는 최고의 의과대학으로 불리우는 에이로쿠 대학
졸업생 사이토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전국 81개 대학에서 매년
8000명이 졸업하는 일본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대학"이라는
자부심의 학교다. 하지만 3만8000엔(약40만원)의 월급과 하루 평균
16시간의 근무로 시작한 사이토의 인턴 생활. 하숙비와 밥값을 위해 다른
개인병원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를 나선 사이토는 이제 화려한 의사생활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현실과 마주한다. 메스도 제대로 못잡아 본
주제에 교통사고로 내장이 파열된 환자의 수술을 단독으로 해야 했던 것.
작가는 "해가 진 일본의 대다수 병원에서는 인턴 혼자만이 당직을 서고
있고, 따라서 사고가 났다 해도 제대로 된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는 충격적 사실을 고발한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밤중에 차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실제로 "인턴의
아르바이트가 금지된 곳은 전체의 약 2%에 불과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턴 중 80%가 단독 진료를 경험했다"는 '전일본 의학생 자치회연합'
조사결과를 덧붙인다.
이 외에도 일본 의료수가 제도의 문제점, 또 실력도 없으면서 대학병원에
만연해 있는 소위 일류병 등 평상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구조적
문제점들을 치밀한 취재를 통해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사이토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교감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눈물샘을
부지불식간에 건드린다.
'제목'에 담겨 있는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사실 이 제목에는 '일본
만화의 신'으로 불렸던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경의(敬意)가 담겨 있다.
실제 의사 출신이었던 데즈카 오사무는 천재 무면허의사를 등장시켜 삶의
비의를 탐구했던 자신의 작품 '블랙잭'을 발표했었고, 사토 슈호는 이
작품의 제목을 '핼로우 블랙잭'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
'핼로우 블랙잭'은 지난해 10월 단행본 1,2권이 동시에 출간되어
175만부의 판매부수를 기록했고, 이어서 나온 3,4권은 41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가 주는 선정적 홍보 문구 이상의
재미와 감동이 그 안에 들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달 말 제 3권이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