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도 나는'기자'였다. 대학신문사에서 일했다. 그때 우리는
'신문의 날'(1983년 4월 7일)을 맞아'오늘의 신문, 무엇을 하는가'란
특집을 마련했다. 필자는 두 사람이었다. 지금은 작고한 선우휘(鮮于輝)
조선일보 논설고문과 얼마 전까지 MBC사장을 지냈던 김중배(金重培)
동아일보 논설위원(당시 직함)이었다.
이들은 그때'선우휘 칼럼'과'그게 이렇지요'란 고정 칼럼을 집필 중인
한국의 간판 논객이었다. 선우 고문은'한정된 조건의 상황에서 최선을-
행간에 어리는 언론인의 땀과 눈물과 피를 느끼길'이란 헤드라인의 글을,
김 위원은 '비판의 자유와 협력의 자유는 표리-통제와 무관한 오보·허보·
독선의 편견은 청산해야'란 기고문을 실었다. 제목에서 느끼듯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느낀 슬픔과 분노, 그리고
다짐을 담담하게 적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암울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도 왠지 싫었다. 그런데 '대선배'들의 글을 받고선 전율을
느꼈다. 선우 고문은 "지난날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그렇고, 또 내일도
언론인들은 '한정된 조건의 상황'속에서 그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며
"어떤 역경에 있어서도 언론은 단념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쇠 힘줄처럼 끈질겨야 한다"고 썼다. 김대중씨 납치 사건에 모든 언론이
침묵하던 박정희 정권하에서 이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한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이란 조선일보 사설을 1973년 9월 6일 '사표'와 함께
집필했던 주인공이 선우 고문이란 사실도 뒤에 알게 됐다.
김 위원은 "정치권력의 언론관이 바로서야 한다"고 전제, "그러나
나로서는 밖에 대한 요구에 앞서 스스로의 치부를 되돌아 보게 된다.
…통제와 무관한 오보와 허보, 그리고 독선의 편견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적었다.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그런데 첫 출근한 바로 다음날 나는
하루를 쉬어야 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신문의 날(4월 7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신문기자들은 신문의 날만큼은 일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한국 언론사를 연구한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는 "신문의 날을 제정하고
그 날짜 신문 발행을 중단하는 당초 의도는 '언론의 반성'이었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던 언론인들이 하루를 쉬면서 과연 참된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를 돌이켜보자"는 설명이었다.
올해 신문의 날, 기자들은 근무했다. 그러나 정 교수 말처럼
'언론의 반성'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기자
들은 노 대통령으로부터'가판구독 금지'와'소주 파티 금지'소리를
들어야 했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취재지침'발표와 정부 부처
공보관 회의의 '취재 제한 방침'결정 뉴스를 접해야 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해 노 정부의 잇따른 언론자유 침해 조치에 대한 비판기사도 써왔다.
그런데 기자들은 잘못한 게 없을까. 과연 오늘 한국의 기자들은 얼마나
자유언론을 위해 스스로 노력했는지, 오보(誤報)와의 전쟁을 정부가
말하기 전에 왜 기자들이 앞장서 치르지 못했는지, 혹시 기자실에 안주해
국민이 원하는 정보 대신에 공무원이 주는 관급 자료에만 의존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본다.
선우 고문이 말한 '한정된 조건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오늘의 기자들이
공무원이나 정치권력을 핑계대면서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기자도 아니다. 정권보다도, 혹시라도 약해질지 모르는 기자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하다. 독자를 위해서 쇠 힘줄처럼 강해지라고 스스로 독려할
때다. 기자가 정말 비참해질 때는 공무원으로부터 취재 거부를 당할 때가
아니라, 기자가 만든 신문이 독자에게 거절당할 때이기 때문이.
(秦聖昊 사회부 차장대우 shj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