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은“미황사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중심 역할을 하도록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 부근에 있는 달마산 미황사는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중엽에 만들어진 천년고찰(千年古刹)이지만
미황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몇년전부터다. 여름·겨울방학이면
전국에서 초등·중학생들이 '한문학당'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들고,
10월말에는 가을 저녁의 산과 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는 작은음악회
'달이랑 별이랑 사람이랑'이 열린다. 또 수시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그때마다 마을 사람뿐 아니라 '미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리서 달려온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퇴락했던 시골 사찰을 오늘의 미황사로 만들어놓은
사람은 금강(金剛·37) 스님이다. 그는 1989년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미황사에 들어와 흔적만 남은 전각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잡초만
무성한 경내를 지게를 지고 매일 돌아다니는 20대 초반의 젊은 스님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지게 스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91년 중앙승가대학에 입학하느라 서울로 떠났던 금강 스님은 1996년 봄
미황사로 돌아와 이번에는 포클레인을 직접 운전하며 도량을 정비했다.
그러다 1년만에 절 집안의 할아버지인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에게
붙잡혀서 백양사 참사람수행결사의 사무처장을 맡게 됐다. 여름·겨울
수련회를 열고 무차선회(無遮禪會)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으며 외환
위기 때는 실직자들을 위한 특별수련회도 마련하는 등 열심히 일했다.

금강 스님이 미황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2000년 봄, 그가 없는 동안
주지로서 살림을 살았던 현공 스님의 강권에 의해서였다. 당시 백양사
운문암에서 참선 공부의 맛에 푹 빠져서 하루 14시간씩 정진하고 있었던
금강 스님은 많은 고민을 했다. "주지를 맡으면 이번 생에 성불(成佛)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현공
스님이 홀연 떠나 버리는 바람에 미황사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엉겹결에 주지가 된 금강 스님은 사찰 운영 방안을 궁리했다. 현공
스님의 노력에 의해 '하드 웨어'는 어느 정도 갖추어졌기 때문에
'소프트 웨어'를 개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여름 대흥사
수련원장 법인 스님의 도움을 받아 한문학당이 문을 열었고, 가을에는
부근 예술인들과 함께 산사음악회가 시작됐다.

금강 스님은 먼곳 나들이를 삼가고 마을 사람들과 부지런히 교유한다.
그는 직접 청년들과 마을 발전 방안을 모색한다. 요즘에는 폐교 위기에
놓인 부근 초등학교 분교를 준대안학교로 살리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미황사의 행사 때면 마을 부녀자들이 비빔밥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주차
정리를 맡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친밀감의 표현이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를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산중(山中) 사찰의 모델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해남(海南)=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