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 칼로 사람을 굴복시킬 수는 있지만 마음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칼을 쥔
사람이 도덕성까지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도덕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현실의 도덕은 관점에 따라, 입장에 따라 언제나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나기 일쑤이니.

불평등은 항상 변화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개방형 불평등 체계인
민주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체제가 역사상 가장 안정된 체제이기는
하지만 계층 간의 이동통로가 조금이라도 좁혀질 때 대중은 금방 변화에
대한 열망에 휩싸인다. 신분사회라면 처음부터 체념이라도 하겠지만
민주사회의 신기루는 불평등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더 갈증나도록 만든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그런 갈증은 더욱 커진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역사를 고리로 이 갈증에 대해
그린 작품이다. 만화가 연재되었던 1995년은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양반댁의 서자로 태어난 주인공의
처지는 민주사회의 아래쪽에 위치한 구성원들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 배경 역시 격동의 산업사회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리라. 스스로를 견자, 즉 '개새끼'라 이름지은
주인공은 칼잡이 스승을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길을 나선다.
유사한 처지에 있는 기생과 도적, 또 다른 칼잡이 등 다양한 군상들이
그를 스쳐간다. 서자 출신의 또 다른 칼잡이 이몽학이 혁명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견자는 스스로를 얽어매었던 신분의 끈이 한계이자
동시에 자유임을 깨닫는다. 자유는 한계가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일까?

무거운 주제만큼이나 박흥용의 그림은 둔중하고 움직임은 정체되어 있다.
격렬한 칼싸움을 그린 장면에서도 정지화면을 보는 것처럼 속도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선승의 대화같은 대사와, 수시로 환각과 꿈을 경험하는
주인공은 독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생각을 강요한다. 사고가 날까 염려하여
아기를 매어 놓은 끈을 보며 마침내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 마지막 장면도
선명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초기 단편들에서 출구없는 상황을 즐겨 그렸던 박흥용은 이 작품에서
나름대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희망은 다음
작품인 '내 파란 세이버'의 좀 더 밝은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그 희망이 우리가 기대하는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견자의 깨달음은
번뇌의 구름을 벗어난 밝은 달처럼 불교적 해탈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까딱 잘못하면 도피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박흥용은 칼의 길을 통해 해탈을 성취하는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일까?
박흥용의 깨달음은 과연 또 다른 좌절감의 반영일까 아니면 진정한
대안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내 파란 세이버'의 완결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준영·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