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인문대학을 가겠다는 내 뜻을 못내 섭섭해하셨다. 그러면서도
결국 내 고집을 존중해주셨다. 지금도 그게 너무 고맙다.
정작 대학은 별 재미가 없었다. 지금도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생각컨대,
내가 '길'을 찾고 있지 않았나 싶을 뿐이다. 한 학기를 견디다가
휴학계를 던지고 절간으로 들어갔다. 동해의 암자에서 몇 달을 지내며
읽은 금강경과 원각경은 요령부득이었다. 선(禪)의 촌철살인이 내가
문제를 잘못 설정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차갑고 시원했다. 나는 이
무의미의 진실을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통해 확인했고, 그 공간에서
노장(老莊)과 더불어 유머를 나눌 수 있었다.
졸업 무렵, 초월이나 은둔이 '사람의 길'이겠는가 싶어서 유학의
가르침에 접근했다. "우리는 새나 짐승이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공자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공자는 잠언적이고 맹자는
웅변적이라, 사람이 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한 유학의
설계도는 보여주지 않았다. 주자학은 그러나 난공불락이었다. 심오한가
싶으면 단순하다고 유혹하고, 풀리겠다 싶으면 어느새 뒤얽혀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사슴 가죽에 적은 가로왈자같다고나 할까. 그 혼란의
비밀을 종내 풀지 못하다가 다산 정약용을 만났다. 나는 그가 쾌도난마로
열어주는 길을 따라 주자학을 비판하고, 그의 근대적 정치신학의 구상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비판의 이유와
근거를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주자학의 속을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그 목소리에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마?庸? 나는 이제 정약용에서 주희에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10년 동안, 주자학과 조선유학의 인물과
사조를 연구해 왔다. 나는 조선유학의 드라마가 규모는 작고 역동성은
떨어지나, 필요한 만큼의 실험과 변화를 거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다시 다산이나 실학이 아니고, 낡은 주자학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나는 실학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면, 주자학은 현실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근대의 실패와 요청 앞에서는 실학이 천양되어야
했지만, 지금 근대의 성취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에서는 단연 주자학이 필요하다. 그동안 내가 주자학의 속살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바로 내 속에 강고하게, 무의식적 수준까지
장악하고 있던 '근대의 시선'이었다. 주자학의 이해는 근대를
객관화하는 용기와 지혜만큼 성장했다.
근대의 세 가지 문제를 꼽자면, 개인의 소외와 공동체의 해체, 자연의
남획과 파괴일 것이다. 이 셋은 얽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얕고 편향된 이해가 있다. 동양철학의 주류적 전통인
노장과 불교, 유학은 인간이 고유한 성장의 방향과 목표를 갖고 있으며,
이것에 합치하는 충동과 의지만이 선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불교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노장은 개인과 자연을 축으로 하고 있는데,
거기 '타자와 사회'가 허술하다. 주자학은 앞의 두 자원을 사회성과
일상성 위에서 통합하는 과감한 기획을 시도했고, 거기 필요한 구체적
훈련의 지침과 방법을 제시했다. 근대의 문제를, 위에서 말한 개인과
사회, 자연의 전 층위에서 포괄적으로 응전하고 있는 동양철학의 유산은
주자학뿐이다. 또 주자학만이 근대의 '지식'을 자신 속에 포섭할 수
있다.
이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조선 유학의 다양한 개성과 변주가 펼쳐졌다.
이를테면 선비의 유교(이황과 이이), 무인의 유교(조식), 정치가의
유교(정약용과 정조), 예술가의 유교(박지원), 상인의 유교(최한기)
등이다. 나는 각 직업과 분야에 따라 이들을 ?D"?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주자학의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교조적 반복이나 생기없는
주석들, 신분적 불평등과 성적 차별, 정치적 파당과 독선, 권위주의적
억압과 위선 등은 쓸어 장작불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 그리고
주자학의 많은 것을 수정해야 한다. 가족적 수직적 인간관계며, 재래의
관습에 입각한 세세한 예(禮)의 절목 등은 달라진 시대에 맞게 대폭
재편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것을 보태야 한다. 공자가 그러했듯
이익을 너무 미워하지 않는 유연함, 그리고 자기 밖의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 등이 그것이다.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동양철학)
◆한형조=▲1958년생▲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박사
▲저서: '왜 동양철학인가'(문학동네)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세계사)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여시아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