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九단.

◇2000년 4월 20일

"변화에 대처하는 실력이 17살 소년같지 않게 뛰어나군요. 재주있는
바둑입니다. 세돌이가 '리틀 조훈현'이라고요? 하하. 저하고 일부 닮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좀 더 부대껴서 실전력이 붙어야
되겠지요."

제5회 LG배 국내 예선 결승서 이세돌이 안조영을 반집 차로 제압,
27연승째(그는 이후 32연승까지 내달렸다)를 올린 직후 조훈현은 그렇게
평했다. 그 때까지 조훈현의 대 이세돌 전적은 5승 1패. 초기 5연승 후
99년 말 LG정유배 예선에서 첫 패점을 기록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아직 이 애송이를 맞수로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2002년 9월 13일

"적수를 꼽으라면 이창호 사범님 뿐이지요. 그 외엔…좀 가능성있는
후배들이 몇 명 보이고…하지만 이미 사실상 실력 최강은 저라고
생각합니다. 이창호 사범도 머지않아 넘어설 자신이 있어요."

제15회 후지쓰배를 제패하고 개선한지 한 달 후 가진 자축연서 이세돌은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느니, 아직도
멀었다느니하는 판에 박힌 겸사(謙辭)를 동원하지 않았다. 이날 거명된
기사는 이창호 뿐. 조훈현 유창혁을 포함한 나머지 기사들의 이름은
완전히 빠졌다. 이세돌은 그 무렵 조훈현에게 무려 7연승을 구가하고
있었다.

◇2003년 6월 16일

제8회 LG배 개막 전야제가 열린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사회자가
전년도 우승자 이세돌을 단상으로 불러냈다. "이 사범은 올해 LG배
추첨에서 누구와 만나고 싶나요?" 이세돌은 머뭇거리지 않고 "조훈현
사범님"이라 답했다. 국제 무대에선 한 번도 대결해보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즉각 조훈현이 불려 나왔다. 50줄에 접어든 조훈현은 꼭 30살 아래인
이세돌의 목을 팔로 휘감더니 말했다. "이거 순 나쁜 녀석 아냐? 내가
너한테 지금 8연패 중이라고 거저 먹겠다는 얘기인데, 늙은 생강 맵다는
걸 보여줄테니 기다려 봐." 물론 함박 웃음을 머금은 채였지만 그는
충격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조훈현의 얼굴을 가득
덮은 홍조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2003년 6월 30일

둘이 14번째 마주앉는 날이다. 장소는 한국기원 특별 대국실. 제37기
왕위전 리그 최종국이다. 두 기사 나란히 5승 1패로 동률 선두여서 이 한
판으로 도전자가 결정된다. 왕위전은 조훈현이 이세돌에 의해 유난히
자주 '물을 먹었던' 무대. 작년 36기 때는 동률자 3명 재토너먼트를
포함해 이세돌이 2연승해 도전권을 따냈었고, 34·35기 때 역시 결정적
고비에서 이세돌이 이겼었다. 이번엔? 아니면 이번에도? 다급하기론
조훈현 쪽이 훨씬 더하다. 영광 가득한 40여년 바둑 인생을 얼룩지게 한
치욕의 8연패. 조훈현의 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