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古墳群) 옆의 능사(陵寺·왕릉에 딸린 사찰) 유적지에서 7세기 중엽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다량의 목간(木簡)이 발굴됐다.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이들 목간은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로 평가되는데 그 중에 16자의 글씨가 새겨진 것이 하나 있다. 목간의 원문은 ‘숙세결업동생일처시(宿世結業同生一處是)’ ‘비행상문상배백래(非相問上拜白來)’의 2행으로 되어 있다.
이 목간은 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내용을 문학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학자는 없었다. 그런데 서울시립대 김영욱(金永旭) 교수가, 이 목간에 씌여진 글자를 이른 시기의 백제 시가(詩歌)로 해석하였다. 필자는 얼마 전 소장·중견 한국학 연구자 모임인 ‘문헌과해석’의 세미나에서 김 교수가 이 원고를 사전 발표하는 자리를 통해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필자를 비롯한 국문학 전공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김 교수가 ‘숙세가(宿世歌)’라고 이름붙인 이 백제 노래가 한국문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간 한국문학사에서 백제의 노래로는 정읍사(井邑詞) 한 편이, 그것도 조선시대의 문헌(악학궤범)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또 가야의 노래인 구지가(龜旨歌), 고구려의 노래인 황조가(黃鳥歌) 등도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한다. 삼국시대의 노래가 당시의 모습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이 백제 목간이 유일하다. 김 교수의 논문을 검토한 서울대 조동일(趙東一) 교수가 “현재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인 ‘한국문학통사’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겠다”고 말한 것은 이 백제 시가가 지니는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또 이 백제 시가는 사언사구(四言四句)로 되어 있는데, 구지가·황조가·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인삼찬(人蔘讚) 등 현재 전해지는 삼국시대의 노래가 대부분 사언사구로 되어 있다. 또 향가 중에도 제작 시기가 빠른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이와 유사한 사구(四句)체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번 백제시가의 발견은 삼국시대의 노래가 사언사구 형식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이 백제 시가의 내용과 성격이 분명히 밝혀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욱 교수는 “전생(前生)에서 맺은 인연으로/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 /시비(是非)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공경(恭敬)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 고 ‘사랑을 다짐하는 노래’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견해를 달리하여 “전생에 맺은 업으로/같은 곳에 태어나게 해 주소서/잘잘못을 따지려 하신다면/위로 절하고 사뢰오리다”라고 ‘발원문(發願文)’으로 풀이하고 싶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때 이 백제 시가는 한국문학사에서 더욱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본다.
(이종묵 서울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