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미군정 사령관 하지와 김구 이승만(오른쪽부터).

미국 일리노이 주(州) 시골 도시 골콘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나 자란 소년이 있었다.

일리노이 대학에서 건축가를 꿈꿨던 소년은 1차대전이 일어나자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태평양전쟁 때는 과달카날과 솔로몬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규 육사 출신은 아니었지만 선두에서 지휘하다 부상당했던 ‘솔선수범형 군인’으로 유명했던 그는 늘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1945년 8월 11일 오키나와 주둔 24군단 사령관이었던 그는 돌연 ‘상급 부대인 10군과 함께 남조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데, 이는 순전히 그 시점에서 한국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존 하지(John R Hodge·1893~1963).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총독’과도 같은 지위에서 한반도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남조선 주둔 미군정(美軍政)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지’라는 이름만 알지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한국을 통치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도서출판 중심)을 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용욱(鄭容郁·43) 교수는 하지를 광복 직후 한국사의 중심인물로 복권시킨다. “전후(戰後) 일본의 기틀을 만든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한 서적과 연구물은 일본에서 수십 종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맥아더’라고 할 수 있었던 하지에 대해선 변변한 전기 한 권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 연구의 불모성은 어디에 기인하는 걸까? 정 교수는 “한국의 현대사가 미군 점령이라는 조건에서 시작됐음을 생각한다면, 하지와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조망은 마땅히 있었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선 드물게 미군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옌칭 도서관과 워싱턴·메릴랜드의 국립 공문서보관소를 1년간 뒤지며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입수했던 정 교수는 ‘1945년 이후의 한국사’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개척자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는 정치적 군인이라기보다는 야전사령관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단순한 집행자’로 보기엔 그가 맡은 역할이 너무나 컸습니다.”

정 교수는 그가 미국의 정책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소(對蘇)봉쇄를 주장했던 ‘냉전의 용사’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는 갓 광복된 조선에서 분출하는 식민잔재 청산 요구와 사회개혁적 열망들이 모두 법과 질서를 교란하는 파괴행위라고 여겼다.

결국 하지의 점령 목표는 우익 정치세력을 키워 정계를 개편하고 좌익의 영향력을 거세하는 것이었다. “김구(金九)는 내가 끓일 스튜의 소금이 될 것”이라는 당시 그의 말에는 한국인 정치지도자들을 ‘공작의 대상’ 정도로 생각했던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도 많다. 미군정은 정보 조작을 통해 반탁운동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하지는 1946년 12월 이승만(李承晩)의 도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유했다는 것. 또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지는 ‘실패한 정치가’였습니다. 한국인들과의 상호 이해나 친선교류보다는 일방적 점령통치로 일관해 훨씬 우호적일 수 있었던 길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분단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죠.” 한국을 떠날 때 ‘연봉 100만달러를 준대도 다시는 그 직책을 맡지 않을 것’이라며 탄식했던 하지. 그가 남긴 유산은 한국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