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때 아버지가 사주신 영어 성경책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경 첫 장에 아버지와 제 이름을 나란히 써주시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책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하셨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막내딸 이정화(李廷華·68)씨가 한국인물전기학회 주최로 열린 ‘춘원 이광수의 생애와 문학사상’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하순 방한, 현재 서울에 체류 중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그는 ‘아버님 춘원’이란 주제로 어린 시절 아버지에 얽힌 추억과 가족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평생 폐병을 달고 다닌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 춘원, 산부인과 의사로 남편의 병 수발과 감옥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 허영숙(許英肅·1975년 미국에서 사망) 여사, 광복 후 반민특위에서의 재판과정, 6·25 때 납북 등등.
“아버지가 저에게 끼친 도덕적·종교적·예술적 영향은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거지를 보면 호주머니에 있는 돈 가운데 제일 큰 돈을 꺼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이씨는 “아버지가 자신의 작품 중 ‘돌베개’ ‘사랑’ ‘원효대사’를 가장 아꼈다”면서 부친의 작품 일부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제 손자들에게 읽히기 위해서죠. 아버지를 위해 제가 할 일은 관련 자료를 빠짐없이 모아 후손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춘원은 광복 이후 줄곧 돌베개를 베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함께 그 돌베개의 뜻을 헤아려 본 적이 있죠. ‘민족을 위하고 동지를 구하려고 한 일이 나중에 민족을 해쳤다 하여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부족하고 덕이 없는 까닭이다. 나는 돌베개를 베고 나를 채찍질하여 내 몸을 닦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단편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지극히 원통한 일은 아버지가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법으로 시달렸고, 북한은 반동이라고 잡아간 것입니다.”
논란을 빚었던 춘원의 과거 행적에 대해 막내딸로서 아쉬움을 분명히 밝혔다. “해방 후 막무가내로 친일파의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은 적도 있었죠. 아버지의 진정한 뜻에 대해서는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먹혀드는 것도 아니고…. 미리 단정해 놓고 대화를 거부하는 풍조는 그동안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 같더군요.”
이씨는 6·25 발발 직후 춘원이 북송되면서 생이별했다. 춘원은 1950년 10월 평양으로 강제로 끌려가던 중 자강도 강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씨는 6·25전쟁 혼란기에 유학을 떠나 미국에 정착, 인도계 미국인 남편(작고)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미 부린 모어대에서 박사(화학) 학위를 받은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 교민들을 상대로 고국의 문화를 가르치는 필라델피아 한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83~84년 경상대 부교수로 재직했으며, 서울대(1998~2000년)와 제주대(2002년 9월~2003년 6월) 초빙교수로 고국의 강단에 섰다.
“미국에 살면서도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지 반세기가 지난 1998년에야 미국 시민권을 얻었죠. 지금도 집 뒷마당에 심은 소나무를 보며 고국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