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사의 동안거에 참가한 외국인 수행자들. 동안거 참가자들은 묵언을 해야 하므로, 종이에 궁금한 점을 적어 선방 입구에 꽂아두고, 스님들도 답을 같은 자리에 꽂아 문답을 하게 된다. /계룡<

“짝! 짝! 짝!” 죽비 소리가 날카롭게 세 번 날자 사위는 적막에 빠졌다. 지구촌 곳곳에서 날아온 외국인 수행자 10여명과 무상사의 내·외국인 스님 15명은 잿빛 옷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을 찾는 물음에 잠겨들었다.

음력 10월 보름이던 지난 8일 새벽 5시, 충남 계룡시 계룡산 무상사(無上寺) 선방. 은은한 불빛 속에 올해 동안거(冬安居)의 첫 좌선(坐禪)이 시작됐다. 전등 외엔 어떤 전기기구도 없는 선방에는, 한구석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와 겨울을 재촉하는 창밖의 빗소리밖에 없었다. 의자생활을 한 서양 수행자들에겐 가부좌 자체가 고행. 그러나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20분쯤 흘렀을까, 곳곳에서 죽비(2개의 대쪽을 합하여 만든 기구) 소리가 들렸다. 졸음을 쫓고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자청해서 맞는 것이었다. 단전에 놓았던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면, 이번 동안거 교육을 맡은 미국인 명행 스님이 와서 등짝을 네 대씩 때려줬다. 5분쯤 더 지나자, 모두 일어나 양손을 단전에 모으고 자신들이 앉았던 방석 바깥으로 원을 그리며 시계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30여명이 움직여도 ‘사각사각’ 옷깃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5분 걷고 다시 좌정했다. 오전 6시, 올 동안거 기간 첫 좌선이 끝났다. 그러나 역시 고요함밖엔 없었다. 동안거 90일 동안은 묵언(默言)이다. 말은 없어도 참가자들의 표정엔 첫 단추를 무사히 잘 뀄다는 표정이 스쳐갔다.

이들의 동안거는 실질적으로는 전날인 7일 오후 시작됐다. 멀리는 러시아와 폴란드, 가까이는 홍콩 등 동남아에서 날아온 참가자들은 7일 오후 1시30분부터 2시간여에 걸쳐 명행 스님으로부터 동안거 중 지켜야 할 28가지 법도를 들었다. 절하는 법, 가부좌 트는 법 등 기본적인 예절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불상이나 다른 사람쪽으로 발을 뻗고 앉는 것은 한국 전통상 예의가 아닙니다.” “코를 소리 나게 풀지 말고 조용히 닦으십시오.” 이어 각자의 발우(식기)와 찻잔이 배분됐다. 명행 스님은 “마지막으로 안거 중 중요한 수행방법을 말씀드리겠다”며 4개의 나무그릇과 나무수저의 사용법을 지도했다. “김치 한쪽은 꼭 남겨두십시오. 음식을 먹은 다음엔 물을 담아 그 김치로 그릇을 씻어내야 합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수행자들은 7일 오후 6시 저녁예불을 겸한 동안거 결제 법회에 참가했다. 역시 미국인인 주지 무심 스님은 “한국의 한 큰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안거 결제는 결제요, 해제는 해제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90일간의 동안거에 들어갑니다. 모른다는 마음(don’t know mind)으로 정진하십시오”라며 영어로 “What is this(이뭣고)?”라는 화두(great question)를 주었다. 그 순간부터 묵언은 시작됐다. 참가자들이 입을 열 수 있는 것은 예불시간에 경전을 읽을 때뿐이었다.

70년대 이후 해외포교에 힘써온 숭산 스님(76세)이 지난 2000년 외국인 스님과 수행자들의 참선공간으로 세운 무상사의 동안거는 한국 전통사찰과는 다소 다르다. 법문도 영어로 하고, 반야심경 독경도 한국어와 영어로 번갈아 한다. 한번 동안거에 들면 출입이 불가능한 한국 사찰과 달리 해제 때까지 매주 토요일에 새로운 수행자를 받고, 1주일 단위로 안거에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제에 임하는 자세와 정신은 한국 사찰과 똑같이 엄격하다. 휴대폰이나 PC는 물론, 책도 지닐 수 없다.

묵언수행에 들기 전 짧게 들어본 이들의 참가 동기는 출가자 못지않게 결연했다.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 10개월간 참선 수행을 해오다 참가한 이스라엘 여성 수행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 신자였고 종교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내 마음을 좀더 고양시키고 싶다”고 했다. 홍콩의 초등학교 교사인 한 30대 여성 수행자는 “한국에서의 동안거가 이번이 네 번째”라며 “교사직은 사직했다”고 했다. “90일씩 비우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없느냐”고 묻자 “진정한 내 삶을 찾는 게 중요하다. 직장은 돌아가서 다시 구하면 된다”고 했다. 참가자 몇몇은 묵언수행이 시작되기 전에도 말을 삼갔다.

주지 무심 스님은 “외국인 스님이나 수행자들이 마음을 하늘처럼 넓게 만들고, 쓰기는 바늘끝처럼 세심하게 하는 선(禪)의 본질을 익힐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매일 오전 3시에 기상, 새벽 5~6시, 오전 8~11시, 오후 1시30분~4시30분, 오후 7~9시 등 네 차례 9시간 동안 좌선한다. 108배와 아침·저녁 예불은 물론, 아침 공양 후에는 청소, 설거지 등 소임을 맡아 일하는 울력시간도 있다.

8일, 아침 공양과 울력을 마친 참가자들은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3시간 동안 이어진 좌선에서는 이날 새벽의 1시간 좌선 때보다 한결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아침 공양 후 발우 씻은 물에 고춧가루가 몇 개 떠 있어 명행 스님으로부터 “음식 찌꺼기가 너무 많다”는 꾸중을 들었지만 11시10분 점심 공양 후에는 야단도 맞지 않았다.

8일 오후 1시30분 오후 좌선시간, “짝! 짝! 짝!” 죽비가 다시 세 번 울렸고, 선방은 다시 적막 속으로 빠졌다.

■ 동안거란?

음력 10월 보름부터 이듬해 1월 보름까지 선방(禪房)과 강원(講院), 토굴 등에서 겨울 동안 이루어지는 수행. 음력 4월 보름에서 7월 보름까지의 여름철 3개월간의 하안거(夏安居)와 함께 참선수행에 전념하는 수좌(首座) 스님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 행사 중 하나다. 올해 불교 조계종의 경우 전국 90여개 선방에서 2100여명의 스님이 참가하고 있으며 기간 중에는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참선수행에 몰두한다. 일반인들이 참가할 수 있는 선원도 있다.

올해 동안거를 맞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평온하고 고요한 경지에서 옷 입고 밥 먹으니, 신통력 부리는 곳에 무엇 때문에 머물겠습니까? 만약 이 이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 한다면 그때마다 삼십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이란 결제(結制·시작) 법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