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에서 지각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92년작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는 92년 일본의 모든 개봉영화 중 흥행 1위를 차지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상업적 성공작은 상업적 ‘기획 상품’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대중이 원하는 게 뭘까’를 계산하며 만들었다기보다는 ‘만드는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니까. 밀리터리 매니아이자 비행기 매니아로 유명한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 비행기와 비행에 관한 그의 벅찬 꿈을 총정리해 놓았다. 그가 원작 만화를 플라모델 전문지 '모델 그래픽스'에 연재했다는 것부터가 매니아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돼지로 변한 이탈리아 비행사 포르코가 모든 '사보이아 S-21'. 이 애니메이션의 흥행으로 실존 비행기보다 더 인기를 끌기도 했다.

1차대전 직후 이탈리아. 구식 진공관 라디오로 칸초네가 울리면서 시작하는 ‘붉은 돼지’엔 사람이었다가 돼지가 된 포르코라는 주인공이 비행기를 타고 창공을 누비며 하늘의 해적단인 공적(空賊)단들과 맞서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관객의 망막에 남는 가장 뚜렷한 잔상은 포르코의 비행기다. 새파란 창공, 솜사탕 같은 구름을 배경 삼아 ‘부르르르릉’ 프로펠러 엔진음을 뿜어내며 선회, 강하하다 지중해 파도를 박차고 올라가는 새빨간 비행기. 이 구식 프로펠러기가 ‘붉은 돼지’의 진짜 주인공이다. 총분량 중 포르코가 지상에 있는 장면보다 비행하는 장면이 더 많아 보인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작품 속 빨간 비행기 ‘사보이아 S-21’은 실존했던 기종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사보이아(Savoia)사에서 1920년대에 만든 사보이아 마르게티 등 경주용 ‘비행정’(활주로 없이도 바다나 호수에서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기)의 이미지를 따모아 창작해 낸 비행기다. 하지만 ‘붉은 돼지’의 흥행 이후 ‘사보이아 S-21’은 플라모델 키트로까지 만들어져 실존 비행기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현실에서 보기 드문 새빨간 이 비행기야말로 오늘의 어른들에게도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마스코트다. 하지만 여기엔 결코 동화적이지 않은 실화가 도사리고 있다. 1차대전 때 90여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독일 전투비행사 만프레드 폰 리히토펜의 비행대는 적에 대한 일종의 ‘경계색’으로 기체를 붉게 칠했는데, 이 리히토펜이 ‘붉은 돼지’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