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100회 넘게 나가는 동안 주인공들이 숱하게 바뀌어 왔거든.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곗돈 붓는데 아주 고마웠다고.”

경북 문경의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 촬영장. 고려 무신정권 시절, 도끼를 휘두르는 ‘금강야차(金剛夜叉) 이의민’으로 등장하는 이덕화가 농담을 던진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둔중한 소리를 내는 갑옷이 보기에도 버겁다. “이 옷 입고 있으면 잘 걷지도 못해요. 가만히 서 있어야지. 이게 무려 30㎏이랍니다. 난 고려시대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일찍 죽는지 이제 알겠어. 이런 옷 입고 어떻게 싸움을 하겠냐고. 또 여자는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요? 절대 제 명에 못 죽었을 거야.”

실제로 극중에서 이 무시무시한 금강야차는 세 명의 여성을 ‘거느리고’ 있다. 부인 최씨(정선경)와 애첩(임경옥),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아란(함소원)까지. 그는 “밤시간을 쪼개 쓴다”며 너스레를 떤다.

‘무인시대’ 제작진은 1주일에 한 번 문경에 내려와 2박3일 정도 합숙하며 드라마를 찍는다. “투입하는 인원과 물량도 거의 매번 ‘특집’ 규모”란다. 하지만 이전 작품 ‘태조 왕건’이 50%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데 반해, 그 절반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이 드라마 시작할 때 정말 꿈이 컸어요. 이제 제대로 드라마 같은 드라마 한번 하는구나, 그랬지. 1, 2회 처음 찍고 방송 나가는데 30% 가까운 시청률이 나왔어요. 이거 되는구나. 밤샘촬영해도 힘든 줄도 몰랐다고. 그런데 지금은 이게 뭐냐고.”

그는 “옆집 드라마는 도마질 몇 번만 해도 그렇게 인기가 높은데, 우리 ‘무인시대’는 도끼질, 칼질에 수십명의 목을 쳐도 시청률이 제자리요, 제자리”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게 패인”이라면서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원래 토요일, 일요일 뉴스 끝나고 하던 드라마가 새 사장님 오시고 나서 갑자기 시간대가 바뀌더라고. 더구나 드라마 앞뒤로 무슨 개혁프로그램이니 뭐니 집어넣어서 사람들 헛갈리게 하고, 아이고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그는 하지만 곧 낙천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이렇게 1년 내내 ‘특집’ 찍듯이 만드는데, 시청자들이 다시 사랑해 주실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그가 들려주는 촬영에 관한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작가 선생님이 대본에다가 딱 한 줄 적어줘요.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죽는 거야. 밤새 전투장면 찍게 되거든요.”

“이제 쉰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우리가 체력은 타고났잖우. 밤샘촬영해도 끄떡없어. 젊은 애들이 미워해”라고 되받았다.

그는 촬영현장에서 순발력 있는 대사처리로도 이름났다. 냉정한 말로 바꾸면 “제대로 대사를 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예전에 드라마작가 김수현씨의 작품 찍을 때를 추억하면서 “내가 애드리브를 하도 많이 하니까, 아예 내 대본에는 ‘이덕화 네가 써라’고 적어가지고 주시더라고요”라고 했다. 그는 “그래도 내가 그 선생님 드라마는 가장 많이 출연한 연기자에 속할 것”이라면서 어깨를 으쓱 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