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의 고교 시절 부분은 네 친구가 이웃 여고 학예회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거기서 준석과 동수와 상택은 ‘연극이 끝난 후’를 멋지게 부르는 진숙을 보며 한 눈에 반하지요. 그 장면은 일종의 특수촬영을 통해 진숙의 노래는 정상 속도로 들려주지만 노래 부르는 모습은 느린 동작으로 펼쳐지도록 인상적 묘사를 하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매혹된 세 남고생 모습을 하나씩 클로즈업으로 비춰가며 강조합니다. 이 장면은 추억이 어떻게 상기되는지를 영화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때 핵심 동력은 바로 그 추억의 과거성을 단박에 불러오는 대학가요제 히트곡 ‘연극이 끝난 후’란 노래에 있지요.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들은 대개 배경 시기의 추억과 밀접히 관련된 노래를 사용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시대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진추하의 ‘원 써머 나잇’과 모리스 앨버트의 ‘필링스’가, ‘품행제로’에서는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가 그런 역할을 하지요. 흘러가버린 그 시대의 대표적 곡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특정 과거는 단번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받고 추억이 된다고 할까요.
지난 토요일 뮤지컬 ‘맘마 미아!’를 보러 갔습니다. 거기 빼곡히 차 있는 아바의 노래들을 듣자니 제10대 중반 시절이 고스란히 떠올랐습니다. ‘아이 해브 어 드림’을 들으면서 그 곡을 처음 들었던 열네 살 때 동해안 하조대 해수욕장에서의 수련회가, ‘댄싱 퀸’을 감상하면서 그 곡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추었던 열일곱 살 때 인천 앞바다의 섬 이작도가 자연스레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더 위너 테익스 잇 올’을 들을 때는 영어사전을 거듭 뒤적여가며 그 슬픈 멜로디에 담겨 있는 우울한 가사를 해독하다가 감상적인 마음에 울컥했던 열다섯 살 어느 긴 여름밤이 되살아났습니다. 너무나 대중적인 아바의 노래들엔 한 번도 열광한 적이 없다고 믿어왔지만, ‘맘마 미아!’는 그 흔한 노래들이 제 추억 속에 촘촘히 박힌 보석이었음을 일깨웠습니다.
하긴 추억을 상기시키는 데 노래만한 게 있겠습니까. 어떤 노래는 특정 장소와, 또 어떤 노래는 특정 사람과 단단히 얽혀 있어서 멜로디 한 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나 공간이 곧바로 떠오르지요. 추억 속에서 노래는 청각에만 머물지 않고 입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고3 겨울방학 때 대학 등록금을 벌 겸 군고구마 장사를 했던 저는 당시 근처 ‘다방’에서 계속 틀어댔던 조덕배의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어디선가 군고구마 냄새가 나는 걸 느끼곤 흠칫 놀라곤 합니다.
영화는 웬만큼 좋아해도 몇 번밖에 보지 않지만, 노래는 즐기면 수백번까지 들을 수 있지요. 다른 어떤 기관보다 싫증을 덜 내는 귀는 인체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니까요. 가장 예민한 시기인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에 심취한 음악은 결국 그 사람 인생 전체의 사운드트랙이 됩니다. 성장한 뒤 듣는 음악은 즐길 순 있어도 세포 속을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김민기나 송창식을 통해 ‘475 세대론’을, 조용필이나 이문세를 통해 ‘386 세대론’을 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 시절 어떤 음악을 들으셨습니까.
(dj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