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식량은 무기와 같았다. 굶주린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어떻게든 경제적 침탈을 막아보려는 약자의 힘겨운 저항을 가능케 한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흉작을 겪은 지방에서 쌀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방곡령’이 지방관들의 직권으로 시행되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늘어나면서 곡물값이 오르고 품귀현상이 나타나는 데 더해 흉작까지 겹치자 각지의 지방관들은 일본을 염두에 둔 방곡령을 시행했다. 그 근거는 1883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의 ‘수해·한발·병란 등으로 인해 조선 국내의 식량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지방관으로부터 일본 영사관에 알려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889년 10월의 ‘방곡령(防穀令)사건’은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원산항을 통해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1년간 금지하면서 촉발됐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외아문독판 민종묵은 조병식에게 해제 명령을 내렸으나 조병식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일본 상인으로부터 곡물을 압수했다.
일본은 방곡령의 폐지와 조병식의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1890년 1월 조병식에 대해 3개월 감봉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대리공사는 본국 외무대신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병식은 강원도관찰사로 전임 조치됐으나 분규는 끝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1889년 5월 황해도관찰사가 시행한 방곡령은 일본 상인들이 황해도에서 구입한 곡물 2130석을 인천으로 반출하려 한 것을 막았다. 분규 끝에 방곡령은 해제됐지만 다음해 새 관찰사가 다시 이를 시행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황해도와 함경도에서의 방곡령에 대해 일본은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고, 양국은 치열한 협상 끝에 1893년 4월 ‘모두 11만원을 일본에 배상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의 침탈은 더욱 심해져 쌀의 유통·생산 과정에까지 침투, 조선 경제를 교란시켰고 일제 강점기로 그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