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에 동원된 청의 군대는 당시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거느렸던 북양해군(北洋海軍)과 회군(淮軍)이었다. 북양해군은 1870년 수도 베이징을 관할하는 직예성의 총독이 된 이홍장이 역점적으로 육성해 온 최강의 정예부대였다. 회군은 이홍장이 1860년대 태평천국운동 진압 참여를 통해 정치적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힘이 됐던 충성스러운 직할 부대였다.
이홍장은 일본과의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외교 교섭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전쟁 과정에서 자신의 군사력이 손상을 입고 국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 조정은 광서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당(帝黨)과 서태후(西太后)의 지지를 받는 이홍장의 후당(后黨)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제당은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도록 이홍장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그는 자신의 군사력을 지키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1894년 당시 청과 일본의 국력·군사력 격차는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운(國運)을 걸고 총력전을 펼치는 일본과 국내의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는 청나라의 차이는 처음부터 승부를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