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흥행전쟁에서 제일 먼저 칼을 뽑아든 ‘트로이’(21일 개봉)는 기묘한 블록버스터다. 수천년 전 그리스 땅에서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화려한 볼거리로 다루면서도 결정적 순간이 되면 시각적 쾌감에서 고개를 돌려 모래 먼지 이는 전장(戰場)의 황량한 빈자리를 처연하게 바라본다.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을 노리는 여름 대작 액션영화로선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악의 구분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대규모 전투장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타오르는 불로 한 사람의 몸을 태워 삶을 무(無)에 돌려주는 장례식 장면들인지도 모른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랜도 블룸)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와 사랑에 빠져 도주한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브랜든 글리슨)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에게 복수를 부탁해 트로이로 연합군을 파견하게 한다. 파리스의 형인 헥토르(에릭 바나)는 전쟁 영웅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를 앞세운 그리스 연합군에 맞서서 트로이 군을 이끈다.
‘트로이’는 신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인간들이 치르는 외로운 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극중 그리스 신들은 대화 속에서나 언급되고 기껏 석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특전 U보트’ ‘사선에서’ ‘퍼펙트 스톰’에서 보듯 스펙터클 속에서 인간 드라마를 잡아내는 데 재능이 있는 볼프강 페터슨 감독은 원작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신화적 속성을 철저히 제거해 장중한 역사극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트로이 전쟁 자체가 아니다. 허무와 싸우는 아킬레스의 전쟁, 조국을 위해 싸우는 헥토르의 전쟁, 사랑을 위해 싸우는 파리스의 전쟁이고, 그런 각자 전쟁의 총합인 것이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극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쟁을 다룬 ‘오락’영화로서 제 몫을 했다. 고대의 다양한 전투 기법들을 커다란 밑그림으로 그리면서, 영웅들이 개별적으로 활약하는 동선도 잘 간추려 묘사했다. 방패를 등에 메고 날아오르듯 적의 어깨를 찌르는 아킬레스의 검술도 멋지다. 특히 벌판에 도열한 트로이 병사들의 방패 숲 위로 그리스 연합군이 내달려 온몸을 부딪는 동(動)과 정(靜)의 충돌 장면은 대단한 볼거리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최후의 일대일 대결을 벌이고 난 뒤 승리한 아킬레스가 패배한 헥토르를 마차에 매달아 끌고 가고,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이 적진으로 단신 잠입, 아들의 시신을 되찾아와 화장하는 장면 속에 전부 담겨 있다. 내내 유장한 대사를 통해 지나치게 무게를 잡아 종종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치곤 드물게 캐릭터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낸 이 사려 깊은 대작영화에는 드문 기품이 있다.
“신들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죽거든” 같은 염세적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서도 “수천년간 기억될 전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주인공 아킬레스는 세계관과 행동이 종종 상충하는 모호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아웃사이더로 그려진 캐릭터의 색깔에 브래드 피트의 존재감이 더해진 아킬레스는 극 전체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감돌게 만들었다. ‘반지의 제왕’ 이후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올랜도 블룸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까지를 아우르는 다른 출연진도 좋은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다. ‘헐크’에 이어 또다시 깊은 인상을 심은 이 배우는 아무래도 앞으로 상당한 몫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