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베트남 부주석 누엔 티 빙 여사

‘빙 여인’을 만나기는 힘들었다. 세 차례 약속을 변경한 끝에 그가 출국하기 하루 전인 24일 숙소인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대면할 수 있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 국가 부주석을 지낸 누엔 티 빙(77)씨. 베트남 어린이 보호기금 총재 자격으로 20일 새벽 서울에 온 그는, 26명의 베트남 심장병 어린이 환자들을 치료해준 부천 세종병원 방문을 시작으로 연일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빙 여인’이란 베트남 국모(國母)로 존경받는 그의 애칭이다. 베트남 혁명 1세대로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남 임시 혁명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여성 정치인이다. 1973년 1월 미국과 맺어진 ‘파리 협정’에서 키신저 미국무장관에 맞서 뛰어난 협상 능력을 발휘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빙 여인’이란 수수께끼 같은 호칭은 그때 얻었다.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총알이 오가는 전투 현장에서 베트남 국민들이 목숨바쳐 싸워주었기 때문에 입으로 싸우는 전쟁터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가 이번에 한국에 온 이유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베트남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비롯해 언청이 환자를 무료로 수술해주고, 빈 딘에 나환자 전문병원까지 세워준 한국선의복지재단, 한국어린이보호재단, ㈜우성아이비 등 한국 민간단체들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는 “베트남에선 치료가 어렵다고 진단받은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웃음과 생명을 되찾아 돌아오는 모습에 가족뿐 아니라 베트남 국민 모두가 감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 부주석으로 재직하던 시절(1992~2002년) 주한베트남대사관을 통해 여러 차례 한국 방문 요청을 받았지만 빙씨는 이를 거절했었다. 한국이 미국과 동맹국이라는 이유에서다.

고집을 꺾은 이유를 묻자 그는 살짝 웃으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한국인들이 이렇게 평범하고 마음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들인 줄 알았더라면 더욱 빨리 왔을 겁니다.”

학창 시절 프랑스 식민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주도, 3년간 악명높은 치화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그는 강인한 베트남 여성의 상징이다. 베트남 여성이 적극적이고 대범한 이유를 묻자 빙씨는 “우리는 수천년 전부터 외침(外侵)에 맞서 온 국민이 싸웠으며, 전쟁은 여성 또한 강인한 전사로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군인이었던 그의 남편은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한다는 빙씨는 대학생인 손자에게 틈만 나면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외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을 거쳐 부주석까지 지냈지만 빙씨는 가난하다. 돈이 생길 때마다 장애인 단체와 빈곤 여성들을 위한 기금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아이들,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베트남엔 너무나 많습니다. 운이 좋아 아직은 건강하니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것이 바로 애국이니까요.”

빙씨는 한국 여성 국회의원이 38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한국 여성이 지닌 엄청난 재능과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주역은 여성이란 걸 곧 실감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