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정수도가 충남 연기(燕岐)·공주(公州)로 사실상 결정됐으나, 국민들은 여전히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국론이 분열돼 있다. 여론조사 결과로는 오히려 절반 이상의 국민들이 반대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하고도 민감한 사안이다. 외국도 수도이전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논란을 거쳤다. 본지는 수도이전을 먼저 경험한 독일·호주·브라질·터키·파키스탄 등의 현지 취재를 통해 성공과 실패 사례를 분석하고 그 교훈을 찾아 보고자 한다.
독일의 수도 이전은 반세기에 걸친 논란 끝에 성사됐다. 한때는 동·서독 갈등과 남·북부 지방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국론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베를린(Berlin)으로의 천도(遷都)는 통일의 완성과 옛 동독 재건을 통한 국가 균형발전이란 명분이 워낙 강했다. 그런데도 임시 행정수도였던 본(Bonn)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정치적 타협 끝에 ‘부분 천도’로 귀결됐다.
반세기에 걸친 논란
독일의 수도 이전 논란은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9년 11월 3일 패전으로 분단된 서독은 ‘잠정’이란 단서를 달아 대도시 프랑크푸르트 대신 본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표결 결과는 200대176이었다.
본이 명실상부하게 서독의 행정수도로 자리잡은 것은 70년대부터였다.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채 가시지 않았던 50~60년대에는 공공기관의 경우 신축 없이 기존 건물을 빌려 사용했다.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는 대명제 때문이었다. 본의 교육대학 건물을 증축한 곳에 연방의회가 자리잡았을 정도였다. 의회는 49년과 54년, 56년, 57년 무려 4차례나 통일 이후 베를린으로 환도(還都)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73년 1월 빌리 브란트 당시 총리는 “연방의 수도는 본”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 본과 연방정부 사이에 ‘본 협정’이 체결됐고, 공공건물 증·개축에 연방 정부의 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통일
독일 통일은 갑자기 찾아왔다.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90년 10월 3일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을 공식 선언했을 때, 본에서는 92년 완공을 목표로 제국의회 건물의 증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90년 8월 진행된 동·서독 통일 협상에서 동독측은 서독법 수용을 조건으로 ‘수도, 의회, 정부 소재지를 베를린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서독은 그러나 총선 이후 의회의 결정에 맡기자는 수정안을 냈다. 결국 타협안으로 통일조약 제2조 제1항은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의회와 행정부의 소재지는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 결정한다”로 귀결됐다.
깊어진 찬반 논란의 골
‘통일 총리’를 자처한 콜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과 동독 출신 의원들은 환도(還都)를 주장했다. 베를린으로의 천도를 통해 통일을 완성하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동·서독 발전의 격차를 해소하고 국토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덧붙여졌다. 수도 이전의 개발 효과를 기대한 베를린 인근의 브란덴부르크, 작센안할트주 등 북부 지방 의원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반대론도 거셌다. 최대 반대 지역은 본이 속해 있고 서독 인구의 3분의 1(1700만명)에 달하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였다. 정부 관리와 학자·중산층은 물론, 기업인들도 “40년간 구축한 선진화된 산업구조와 네트워크를 포기할 수 없다”며 극렬 반대했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도 이전에 막대한 비용을 더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또 좀더 발전된 지역에 투자를 집중,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는 주장도 덧붙였다. 나치 정권의 악몽이 채 가시지 않은 베를린 이전에 대한 불안감도 컸다.
이전 결정과 부분 천도
논란은 거셌다. 찬반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본 일대 부동산 가격은 폭락 조짐이 완연했다. 독일은 동서남북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보였다. 수백 차례의 공청회와 각종 토론회가 열렸다. 하지만 콜 총리는 “장벽과 철조망이 쳐진 베를린에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희망은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는 것”이라며, 이전을 강행했다. 사민당 총재 출신 빌리 브란트 전 총리도 지지했다. 결국 91년 6월 20일 밤 10시, 의회는 ‘독일 통일의 완성’이라 명명된 ‘연방의회의 베를린 이전안’을 표결에 부쳤다. 338대320. 이전안은 아슬아슬하게 가결됐다.
부분 천도 결정
의회는 91년 12월에 ‘95년 수도 이전 개시. 99년 수도 이전 완료’라는 내용의 결의안까지 채택, 이전 작업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국민여론을 감안, 94년 12월 ‘베를린·본 이전 법률안’을 제출, 통과시켰다. 외무 등 핵심 10개 부처만 이전하고, 환경 등 6개 부처는 본에 남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200억마르크(약 12조원)를 이전 비용 상한선으로 정하고, 연방상원과 행정요원 65%를 본에 잔류시키기로 했다. ‘절반의 지지’만으로는 완전 천도가 어렵고, 독일을 먹여살릴 본 등 남부 지방의 급격한 경제 위축을 막기 위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