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인구 1000만명이 넘는 터키 제1의 도시다. 하지만 이 나라의 수도는 이스탄불이 아니라, 인구 400만명의 제2 도시인 앙카라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이 두 도시에 터키의 역사가 집약돼 있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의 천도(遷都)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터키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스탄불은 과거 1600여년 간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다. 앙카라는 80여년 전인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로 정해졌다. 앙카라는 터키를 공화국으로 독립시키고 근대적 개혁을 일궈낸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케말리즘’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박물관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터키의 수도 앙카라 전경.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출범시키고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다.

◆ 천도 이유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당시 독일 편에 섰다가 패전국 대열에 속해 서구의 분할 통치하에 놓이게 됐다. 1차대전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무스타파 케말은 앙카라를 근거지로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와 서구 열강에 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펴 나갔다.

케말의 정치적 근거지가 앙카라라는 점도 있지만, 이곳을 수도로 선택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군사적 안보라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다.

왜 앙카라가 수도가 됐느냐고 물어보면 터키 지식인들은 지도부터 펼친다.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유럽 일부에까지 걸쳐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제국과는 달리, 20세기 초 터키 공화국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그러다 보니 제국의 중심에 놓여 있던 옛 수도 이스탄불은 터키 국토의 북서쪽 변방 도시가 됐고 외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과거와의 단절이었다. 터키 독립운동을 이끌고 초대 대통령을 지낸 케말은 제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스탄불과 단절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국을 상징하는 근대 도시로 앙카라를 선택했다.

케말은 당시 인구 3만명에,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골 마을 앙카라에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서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토대가 되는 수많은 개혁을 이뤄냈다. 그는 정치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세속주의를 표방하면서 이슬람 율법 대신 근대법을 도입했다.

문자 개혁을 단행했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터키인의 조상’이라는 뜻의 성(姓) 아타튀르크를 국회에서 부여받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라고 불리는 그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고 있다.

◆ 새 수도의 건설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 건설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당시에도 앙카라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은 쉽지 않았다. 모든 공공기관을 3년 안에 옮기도록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발하는 이스탄불의 공무원들에게는 사임 압력까지 가했다.

이스탄불에 있었던 외교 공관들의 반발도 컸다. 앙카라를 수도로 선포하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한 후 2년이 지난 1925년에야 소련과 아프가니스칸이 앙카라로 대사관을 옮겼다. 이어 1929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1930년에 영국이 대사관을 옮겼다. 대사관들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아 결국 터키 정부는 외교 공관이 들어설 부지를 공짜로 제공하는 유인책을 내놓았다.

앙카라는 공화국의 비전을 담은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터키 최초로 도시 계획을 도입했다. 1928년 국제 경쟁을 거쳐 독일인 건축가 헤르만 얀센이 앙카라의 도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얀센이 앙카라의 청사진을 그릴 때만 해도 최대 도시였던 이스탄불 인구가 79만명 수준이었다. 그래서 앙카라는 인구 30만명을 전제로 한 계획 도시로 입안됐다. 오늘날 그 10배가 넘는 인구 400만명의 도시로 급팽창하면서 주택·물·전기 부족 등 난개발 문제가 심각하다.

◆ 앙카라와 이스탄불

80년 역사의 ‘공화국 수도’ 앙카라는 정치·교육의 중심지이다. 앙카라에는 대통령궁과 총리관저, 정부 부처, 각국 대사관과 국회 등 나라를 움직이는 입법·행정·사법 기능이 모여 있다. 앙카라대·중동공과대·가지대 등 명문 국립대도 있다.

반면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경제·문화·관광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이스탄불에 터키 전체 부(富)의 40% 이상이 편중돼 있다. 특히 1983년 외잘 총리가 경제 개방 정책을 펴면서 이스탄불은 과거의 축적된 잠재력을 바탕으로 국제도시로 거듭났다. 기업들의 본사는 대부분 이스탄불에 있다. 앙카라가 정치 수도라면, 이스탄불은 경제 수도인 셈이다.

앙카라가 이스탄불에 비해 인구나 경제 규모, 국제적 지명도는 뒤떨어지지만 터키인들 스스로는 성공적인 천도로 꼽고 있다. 낙후된 중동부 지역에 앙카라라는 새 수도가 뿌리내림으로써 국토의 균형 발전이라는 과제가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동공과대학의 바이칸 귀나이 교수는 “20세기 초 터키는 수도 이전이 꼭 필요한 시점이었고, 지리적 위치도 적절했기 때문에 비교적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귀나이 교수는 “한국도 수도 이전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시대적으로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인지부터 먼저 따져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경희특파원 khka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