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도(西間島)는 간도(間島)와 다른가? 그 영유권은 또 어떻게 되는가?”

‘간도’라는 지명은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원래 ‘간도’는 함경북도 종성군과 온성군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 중간의 삼각주를 가리키며, 19세기부터 두만강을 건너 땅을 개간하는 인구가 급증해 백두산 동쪽의 비옥한 토지를 모두 ‘간도’라 부르게 됐다. 우리 민족이 정착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했다. 넓게는 만주지역 전체를 ‘간도’라고 부르는 용례도 생겨났다.

우리가 보통 ‘간도’라 부르는 지역은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간도(東間島)’지역에 해당한다. 백두산 서쪽의 ‘서간도’는 이와 다른 지역이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일본, 서양의 많은 기록과 지도에는 압록강 북쪽의 ‘서간도’ 지역 역시 조선 영토로 표기돼 있다.

1737년 프랑스 지리연구가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 전도’, 프랑스 듀 알드(Du Halde·1740년)와 보곤디(R de Vaugondy·1750년) 지도, 영국 윌킨슨(Wilkinson·1794년) 지도와 1716년 청나라에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 등이 그렇게 표기된 대표적인 지도들이다.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는 ‘조선의 변경이 심양(瀋陽)과 길림(吉林)에 접했다’고 적었다.

압록강 북쪽에 그어진 이 국경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명나라 때부터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요동(遼東) 동북쪽 변경에 중국측이 울타리를 설치했던 ‘책문(柵門)’과 청나라 때인 1660년대 이곳에 버드나무를 심고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만든 것이 실질적인 한·중 간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본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의 실측도에 그려진 ‘레지선’이 바로 이 국경선이며, 이 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그려져 있다. 서간도지역인 통화(通化)·환인(桓仁) 등지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까지 3만7000명이었으며, 조선 정부는 1903년 양변(兩邊)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지역의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북간도(北間島)’는 보통 ‘동간도’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하얼빈과 길림(吉林) 등 북만주 지역을 보통 ‘북간도’라고 표현할 때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북쪽인 송화강(松花江) 동쪽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지리적 개념은 1924년 프랑스 파리 외방정교회가 발행한 ‘한국의 가톨릭’에 실린 지도에 조선교구의 영역을 흑룡강성 일부까지 그린 것과 대체로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