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비(辦公費).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공무(公務)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고 돼 있다. ‘업무 추진비’라고도 부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판공비는 고위 공직자들이 맘대로 쓸 수 있는 ‘쌈짓돈’으로 여겨졌었다. 누가 감시를 한 것도 아니고, 공무원들도 굳이 얼마를 어디에 썼는지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판공비도 엄연히 국민의 혈세라는 원칙이 강조되면서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으로 감시에 나선 게 계기다. 이제는 ‘공무원들이 함부로 쓸 수 없는 돈’ ‘공개돼야 할 행정 정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 서울시장 등 웬만한 고위 공무원들은 매년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국민 앞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고, 이런 흐름과 따로 노는 곳이 있다. 바로 국회다. 국회의장단, 국회 사무총장 등에게 분명히 판공비가 나가고 있지만 도대체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 알 수가 없다.
국회 예산 구조상 지도부의 판공비는 예비금 항목에 들어있다. 예비금은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 헌법기관들이 행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예산을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해 마련하는 예산이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9일 올해 예비금 지출 건을 의결했다. 이미 1차로 쓴 돈이 24억6800여만원이고, 이날 2차로 지출키로 한 돈이 25억여원이다. 국회 사무처가 운영위에 낸 예비금 지출 명세서를 보면 ‘의장단 의정활동비’ ‘국회운영 대책비’ ‘국회 특수활동비’ ‘정기국회 활동지원비’ 등의 항목이 보인다. 사무처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모두 국회의장단과 국회 사무총장의 판공비, 교섭단체 원내대표들에게 판공비조로 주는 지원금이라고 한다.
국회의장단 판공비인 ‘의장단 지원활동비’는 1차에 3억6000만원, 2차에 1억2000만원 등 모두 4억8000만원이다. 또 사무처 관계자가 “(김원기 국회) 의장님과 (남궁석 사무)총장님의 판공비”라고 설명한 ‘국회특수활동비’는 1차 5억9000만원, 2차 6억3753만원 등 12억2000여만원이나 된다. 교섭단체 원내대표들에게 주는 ‘정기국회 활동지원금’으로는 1억4000만원이 나갈 예정이다. 이 돈을 모두 합치면 18억여원이다.
국회의장이나 사무총장은 일단 국회 운영위의 동의만 얻으면 사실상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이 돈을 맘대로 쓸 수 있다. 이들은 결산 심의를 위해 다음 해에 국회 운영위에 사용 내역을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총액 규모만 밝히면 되기 때문에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는 쓴 사람 본인 밖에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사무처 관계자에 따르면 의장단은 카드가 아닌, 현금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용처(用處)를 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국회사무처는 심지어 국회의원이 요구해도 판공비 사용 내역을 감춘다. 시민단체가 국회를 상대로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1, 2심에서 모두 이겼지만 여전히 국회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판공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쓰는 일이니 만큼 최소한의 투명성은 확보해야하지 않겠는가. 기회 있을 때마다 국회 개혁을 외치는 김원기 의장은 이 부분에서도 솔선수범해야 한다.
(신효섭 정치부 차장대우 bomna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