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노벨문학상의 월계관은 오스트리아의 급진 페미니스트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58)에게 돌아갔다. 이날 수상자 발표 직전까지 국내외 어떤 미디어도 그를 지목하지 않았기에, 옐리네크의 수상은 일견 ‘이변’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1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와 남녀 주연상을 차지한 영화 ‘피아니스트(La pianiste)’의 원작 소설 작가인 그는 충격적인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현존하는 독일어권 작가 중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1946년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주 뮈르츠추슐락에서 출생한 옐리네크는 빈에서 자랐다. 1970년대 초에는 베를린과 로마에서 살았고, 현재는 전업작가로 빈과 뮌헨에서 활동하고 있다. 옐리네크는 1986년 독일의 하인리히 뵐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독일어권에서 문학성을 인정받았지만, 정작 그가 자라난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성향 때문에 ‘조국을 욕되게 하는 비판자’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오스트리아라는 모자에 꽂히는 깃털(장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옐리네크의 어머니는 강압적인 훈육방식을 통해 그녀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우려 했지만, 옐리네크는 결국 음악이 아닌 문학을 선택했다. 대학에서 연극학과 예술사, 독문학을 전공한 작가는 처녀작 ‘우리는 미끼새들이다’ 이후 ‘연인들’ ‘내쫓긴 자들’ ‘욕망’ ‘질병 혹은 현대의 여성들’이라는 문제작을 연속적으로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23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청년문화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70년대 격렬한 여성 의식과 저항을 담은 작품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운명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남성이고, 누군가 운명을 부여받는다면 그것은 여자이다.”
“여성은 아픔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남성의 폭력과 여성의 아픔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의 교집합이자 합집합이다.”
그같이 말해온 옐리네크는 대결적 성차별 의식을 바탕으로 어느 여성작가보다 강도 높은 페미니즘 목소리를 냈다. 여성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의 희생자라고 봤던 대부분의 여성 운동가들과 달리, 옐리네크는 여성 자신들의 우매함과 천박함이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존립을 강화하고 있다는 입장을 가졌고, 그것은 여성운동가들을 자극했다. 누구보다 페미니즘의 기치를 높이 든 옐리네크였지만, 그 같은 무자비한 여성 의식 때문에 다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반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성묘사, 가차없는 현실 폭로, 마구잡이로 토해내는 언어 등으로 격찬과 비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의 자아 실현이 남성 중심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와, 그 같은 사회배경에 깔린 남근(男根) 중심주의의 폭력성이다.
국내에서도 상영된 영화 ‘피아니스트’(미하엘 하네케 감독)는 그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이병애 옮김·문학동네)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은 옐리네크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자신을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켰던 어머니를 증오하는 에리카가 주인공이다. 정신적으로 자신을 결속한 어머니 사이에서 성적인 불구자로 지내던 에리카가 제자와 벌이는 비틀린 애정 행각은 모녀 및 남녀 관계의 폭력적 본질에 대한 무자비한 탐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