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인 염병이 나돌면 이 병마가 두려워 도망칠 무서운 관직명을 붉은 글씨로 써 문기둥이나 환자의 이마에 붙여 대결시켰다. 일제 때 조사된 이 두려운 관직명은 '평안감사(平安監司)' '포도대장(捕盜大將)' '순사(巡査)' '산림주사(山林主事)' '면서기(面書記)' 등이다. 병마도 무서워 도망쳤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주사(主事)와 서기(書記)였다. 어릴 적 강변에 서깃벌이라는 들판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마을 사는 면서기 한 분이 클로버 씨앗을 뿌렸다 하여 자기와 자기네 친척의 소나 염소 아니면 이 들판에 매지 못하게 해서 얻은 이름이다. "감사면 다 평안감사냐, 첩이면 다 주사첩이냐" 하는 속담도 있었다. 주사가 가장인 어느 한 문중의 묘제(墓祭)에서 종부(宗婦)가 성묘할 차례를 앞질러 주사의 첩이 성묘를 한 것이 불씨가 되어 문중이 들고 일어선 사건 이후에 나돌았던 속담이다. 민중 앞에 이처럼 위세가 당당했던 주사와 서기의 관직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실무의 책임직이던 한(漢)나라 관직명인 주사를 도입한 것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때다. 고려시대에는 종7품 벼슬이었는데, 군수가 종4품인 것과 비겨봄 직하다. 조선조에도 관직으로 명멸하다가 갑오개혁 후에 장관이 관장하는 판임(判任) 벼슬이 되어 일제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때 문헌인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주사란 관리의 속칭'이라 했으니 주사 하면 관리를 뜻했을 만큼 역사도 유구하다. 역시 한(漢)나라 때 각 관장이나 대장군의 군막(軍幕)에는 기실(記室)이라는 게 있었고 그 기실에서 기록을 관장하는 직책을 서기라 한 것을 고려 초기에 7품 관직으로 도입한 것이다. 비밀을 관장하기에 비서(?書)와도 혼용되어 고급 비밀을 관장하는 공산당의 당서기나 서기장 하면 최고직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장관을 뜻하는 세크러테리도 비밀 관장의 서기인 셈이다.

주사나 서기는 오랜 실무관직으로서 그에 얽힌 부수 문화 또한 방대할 것이다. 제도를 바꿀 때는 그에 얽힌 역사와 민중의 애환 등을 종횡으로 캐내고 살피어 역사 속에 고이 묻는 것이 후대를 위한 도리라고 본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