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日 오사카
문세광과 공범들 범행 첫 모의
■1973년 10월 오사카 한국측 수사 결과에 따르면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저격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73년 10월 하순이다. 고교 친구인 요시이 미키코(공범)와 오사카(大阪)의 한 찻집에서 "한국에서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박정희 제거밖에 없다"며 말을 꺼냈다.

■1974년 5월 만경봉호 문세광은 73년 11월 오사카 조총련 간부였던 공범 김호용에게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 74년 5월 오사카에 정박한 만경봉호에서 사상 교육을 받는다.

■7월 오사카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 파출소 뒷문으로 침입, 권총 2자루와 실탄 10발을 훔쳤다. 경찰은 자고 있었다. 위장용 여권과 한국 비자도 준비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오른쪽 한복 입은 여성)가 문세광의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사진촬영한 사람은 당시 조선일보 사진부 임희순 기자뿐이었다. 이 특종 사진은 그러나 정부의 통제 때문에 6일 뒤에야 본지에 실렸다. 조선일보DB

1974년 8월 6일 김포공항
라디오에 권총 숨겨 입국
■8월 6일 서울 문세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권총을 숨기고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에 온다. 엑스레이 검색대는 무용지물이었다. 서울 조선호텔 1030호에 투숙한 문세광은 청평 등을 관광하며 시간을 보냈다.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
10초간 5발… 제3탄은 불발
■8월 15일 09:00 문세광은 포드M-20 승용차를 1만원(당시 쌀 한 가마 7440원)에 빌려 타고 서울 국립극장에 도착했다. 일본인 고위층 행세를 하며 쉽게 검문을 통과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와 로비에서 서성거렸다.

■09:45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경축식 참석을 위해 청와대를 출발했다.

■10:00 문세광은 대통령 내외가 극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1차 암살을 시도하지만 대통령이 환영 나온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기회를 놓쳤다.

■10:20 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10:23 좌석 맨 뒤쪽에 있던 문세광은 대통령 연설이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라는 대목에 이르러 권총에 손을 댔다. 뽑으려는 순간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첫 발이 발사돼 문세광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총소리는 스피커 소리에 묻혔다. 문세광은 곧바로 권총을 빼들고 통로를 달려 나갔다. 첫 발사 후 5초 뒤에 쏜 2탄은 대통령의 방탄 연설대 상단부에 맞았다. 대통령과 18m 거리에서 3탄을 쐈지만 너무 빨리 연달아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격발이 안 됐다.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낮춰 피했고 표적을 잃은 문세광은 육 여사를 향해 4탄을 쐈다. 머리에 명중되며 육 여사의 고개가 꺾였다. 마지막 한 발은 연단 뒤 태극기에 맞았다. 첫 발사 후10초가 걸리지 않았다. 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10:40 육 여사는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고, 보리차 한 잔을 마신 박 대통령은 다시 경축사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19:00 5시간40분에 걸친 수술을 했지만 육 여사는 끝내 숨을 거두고 한 시간 뒤 청와대로 시신이 옮겨졌다.

1974년 12월 20일 서울구치소
사형선고 3일뒤 집행
■12월 20일 서울구치소 문세광은 10월 7일 법정에 섰다. 특별히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다. 10월 19일 1심, 11월 20일 2심, 12월 17일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이 선고된다. 선고 3일 뒤인 12월 20일 사형이 집행됐다. 문세광은 "대통령과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유언을 녹음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