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사건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박정희 정권에 밀어닥친 '쓰나미(거대 해일)'였다. 여권의 권력 지형이 바뀌었고 박 정권이 쇠퇴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박 전 대통령 자신이 달라졌다. "박 전 대통령은 부인 육영수 여사를 잃은 뒤부터 급격히 무너졌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증언들은 수없이 많다. 소수 충성파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고, 정치적인 무리수가 남발됐다. 1975년 5월에 나온 긴급조치 9호는 반정부활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당시 경호실장은 최고 권력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 자리가 박종규(朴鐘圭)씨에서 차지철(車智澈)씨로 넘어갔다. 10년 경호실장 '피스톨 박'(박씨 별명)이 지고 국회 내무위원장이던 차씨가 부상했다. 차씨도 박씨와 함께 5·16 쿠데타 멤버다. 차씨는 경호실장이 되고 난 뒤 박 전 대통령의 임기 말 철권통치를 주도했다. 그는 경호실 국기하기식이란 거창한 군행사를 벌이며 장관 등 정부 요인들을 불러모아 위세를 과시했다. 차 실장은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씨와 충성 경쟁을 벌이다 결국 10·26사태를 불러왔다.

김종필(金鍾泌) 총리, 신직수(申稙秀) 중앙정보부장, 김정렴(金正濂) 청와대 비서실장 등 다른 사람들도 타격을 받았다. 김용태(金龍泰) 원내총무 등 공화당 지도부, 백두진(白斗鎭) 의장과 민병권(閔丙權) 원내총무 등 유정회 간부들도 일괄 사표를 내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치안 책임자였던 홍성철(洪性澈) 내무장관과 박종규 실장 두 사람의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인책을 매듭지었다. 광복절 경축식을 맡았던 양택식(梁鐸植·당시에는 대통령이 임명) 서울시장은 이들보다 늦게 그 해 9월 3일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