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충무로가 굴곡 많은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하면서 정치권이 직접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다룬 '실미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발사를 소재로 한 '효자동 이발사'에 이어, 곧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하면서 영화를 통한 '박정희시대 다시 보기'는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80년대 쟁점에 관한 영화도 잇따라 기획되고 있다. 두 시대에 정치적 뿌리를 둔 한나라당, 그 상대방인 열린우리당이 모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은 1974년 인혁당 사건을 영화로 준비 중이다. 사형 선고 후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던 이 사건은 이미 연극으로도 공연된 적이 있다. 박 감독은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상업적으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보이겠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은 국정원의 과거사진상규명 대상에 올라 있기도 하다.
제작사 마술피리가 준비 중인 'TBC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가제)는 80년 언론통폐합 당시 삼성의 동양방송(TBC)이 KBS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기민 대표는 "아직 당시의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남아 있는 상황이라 사전에 논란에 휘말리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서 20여 명의 사수대를 이끌다 사망한 윤상원씨 이야기도 스크린에 옮겨진다. 윤씨는 80년대의 대표적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사)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인물, 제작사 '기획시대' 유인택 대표는 "5·18 항쟁은 이제 역사적 비밀이 거의 벗겨진 상태라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에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며 "최대한 영화적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전했다. 언론통폐합과 광주항쟁 모두 '가해자'측 사람들은 상당수가 한나라당의 전신인 구 민정당과 관련돼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MK픽쳐스는 후속작으로 19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전쟁'(가제)을 준비중 이다. 황규덕 감독은 "미국 쪽에서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반미영화가 아니라 반전영화"라고 설명했다.
이광모 감독('아름다운 시절')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의 흥행 성공이 과거사를 다룬 영화에 투자를 불러들인 측면이 있으나 민감한 소재일수록 인간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