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깨나 하는 놈 가막소로(감옥으로) 가고요." 김지하 시인이 담시(譚詩) '오적(五賊)'에 사용해 유명해진 이 민요 구절은 언론자유가 탄압받던 유신 시절을 상징적으로 노래했다. 그랬던 것이, 강산이 몇 번 바뀌더니 마침내 말깨나 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직설적 화법의 달인인 노무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정동영 통일부총리와 유시민 의원으로 대표되는 현 집권층 인사들의 말재간 역시 현란하기 그지없다. 오죽했으면 같은 당의 김영춘 의원이 유 의원을 겨냥해 "옳은 소리를 저토록 ×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고 했겠는가.
이런 말재주들이 국내에서는 인기를 끌지만 국외로 나가면 역효과를 낸다. 노 대통령이나 정 부총리의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외교'가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일시적으로 후련하게 만들어주기는 한다.
하지만 나중에 그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직장에서 '폼나게' 할 말 다한 뒤 사표를 내던진 가장(家長)을 바라보는 가족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나라 집권층 인사들의 직설적이고 거친 언사와는 달리 미국 지도층의 한국에 대한 발언은 대체로 매우 '외교적'이다. '폴리티컬 커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 문화에 익숙한 그들인지라 말들을 조심스럽게 한다.
'정치적 적합성'쯤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어기면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다.
지난 1월 남녀 간 과학 능력의 차이를 언급했다가 지금껏 곤욕을 치르고 있는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의 '잘못'은 바로 이 폴리티컬 커렉트니스를 어겼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여자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발언이 '잘나가는 남성'이다 보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비하한 것으로 해석되고 말았다.
사회적 지탄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도 폴리티컬 커렉트니스는 존재한다. 국민 정서가 그것이다. 한승조 전(前) 고려대 명예교수는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을 어겼다. 그의 무신경함 때문에 합리적 우파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일제시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근대화 전후 시기의 경제 발전은 곧바로 인구 증가를 초래한다. 경제사학자들의 실증연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이전 250여년 동안 우리나라 인구는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0~1942년 우리나라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2.09%로 비슷한 기간 세계 평균 0.85%보다 2배 이상 높은 비약적 증가를 기록했다. '일제(日帝) 수탈론'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것은 무척 당혹스러운 연구 결과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미국식 폴리티컬 커렉트니스에 무지한 탓인지 '막말'도 예사로 한다. 그런 그들이 한국판 폴리티컬 커렉트니스를 이용하는 데는 귀재들이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에 이어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일제 침략 행위를 옹호하거나 관련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민 정서에 편승한 이런 법들은 우리나라 근대화 관련 실증 연구를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모진 시집살이를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고 했던가.
말깨나 했다가 고생했던 분들이 권력을 잡더니 바른말깨나 하려는 사람들을 ‘가막소’에 보내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독선(獨善)은 무서운 병이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