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년 연상의 줄리아 여사와 행복한 한때를 지냈던 이구씨. 후사가 없던 이들은 결혼 23년여 만인 1982년 이혼한다. 줄리아는 이혼 뒤 최근까지도 이구씨와의 재회를 희망했으나,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2. 1963년 귀국 직후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구씨(왼쪽)와 어머니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오른쪽) 3. 1996년 11월 25일 귀국 직후, 서울 종묘에서 역대 왕들에게 자신의 귀국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내는 이구씨

한 사내가 돌아갔다. 이제는 고급 호텔로 변한, 자신이 태어난 터에서. 이구(李玖·1931~2005)씨.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세손이며, 영친왕(英親王·1897~1970)과 일본 왕족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의 아들. 후사(後嗣)도 없고, 일본과 한국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못한 그의 죽음을 지켜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본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도쿄 한복판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19층. 조그만 싱글룸에서 그는 16일 세상을 떠났다. 이구씨의 죽음을 발견한 사람은 외가친척 나시모토씨. 19일 나시모토씨는 "전화를 해도 받지않아 호텔로 찾아갔더니 화장실에서 숨이 멎어 있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씨를 보살펴온 나시모토씨는 "지난 6월 집세를 못내 살던 집을 나온 뒤 호텔에 투숙토록 했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은 18일에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사장 이환의)에 알려졌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망국과 일제 강점을 거치며 뒤틀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고스란히 함께 한다. 1931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이 들어선 그 자리, 영친왕궁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망국의 이름뿐인 왕이었다. 일본 왕실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세자(世子)'로 책봉했고 종친회도 그를 '황세손'으로 인정했다. 그의 삶에 영영 족쇄로 남은 이름이었다.

일본에서 교육받았던 그는 14세에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되찾은 조국으로 '귀향'은 허용되지 않았고 맥아더 사령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MIT대학 건축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한 건축사무실에서 일하며 만난 줄리아 여사와 결혼했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귀국한 그는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서 건축공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 좋은 건물을 많이 짓고 싶다"던 그는 건축 스케치를 여러 점 남기며 조국에서의 안착을 꿈꾸었다. 그러나 꿈은 허락되지 않았다.

1979년 그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고, 그는 "돈을 구하러 간다"며 고국을 떠나 일본에 머물렀다. 그 와중에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운 종친회 등의 압력 속에서 줄리아 여사와 이혼했고, 사기 혐의로 고소당했으며,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을까. 이혼 뒤 그는 일본인 여성 점성술사와 함께 살았다. 그는 1996년 11월 '영구 귀국'했다. 종묘에서 열리는 대제(大祭)를 주관하기도 했지만 그는 "나는 개인 이구일 뿐이며 나같은 인생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자주 되뇌었다고 한다.

20일 낮 도쿄를 출발하는 그의 육신은 한때 어머니·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창덕궁 낙선재에 모셔진다. 1989년 4월 이방자 여사와 그의 고모 덕혜옹주의 빈청(殯廳=빈소)이 잇따라 차려졌던 곳이다. 장례는 9일장으로 24일 오전 10시 발인 예정.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고종황제릉) 뒤편 영친왕 묘역(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