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약 5000년 전 바빌로니아 남쪽, 그러니까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살았던 수메르족을 소재로 했다. 당시 그들은 오리엔트 최고의 문명을 구가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살았던 땅 이름이 수메르(Sumer)다.
'제가 정말 신족(神族)입니까? 참다운 신만이 참다운 백성을 만든다는 신의 자손 그 신족입니까?'(하권 211쪽)
주인공인 에인 왕은 그렇게 묻는다. 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왕은 언제나 인간과 신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잡기 위한 번민에 휩싸여 있었다.
에인은 지금의 중국 송화강 유역인 소호국 출신이다. 에인은 어려서 신조(神鳥)인 봉(鳳)을 목격하고 왕자로 선택된다. 에인은 딛을문, 니푸르, 시파르, 에리두, 슈르파크, 라라크, 바드티비라 등을 차례로 정벌하면서 서쪽으로 달려나가 마침내 소머리국(수메르국)이라는 국가를 세운다. 나중에 그는 수메르 사직(社稷) 1000년 동안 주신(主神)으로 남는다. 기나긴 원정의 길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마침내 뒷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부르는 찬란한 꽃을 피우는 원조가 되는 것이다.
"너는 시월 제천에 마침내 신족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과 편안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족에게는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떤 지시의 힘이 따로 있고, 그 지시의 힘이 네가 바라지 않은 길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상권173쪽)
에인을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고 그것을 한국 소설로 만들어내는 데 윤정모가 매달렸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에인이 바로 환족(桓族)의 소호(少昊)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족은 바로 우리 조상이 아닌가. 수메르인들이 사용하던 태음력이나 60진법이 모두 소호에서 유래된 것이며, 수메르인들이 사용하던 언어 또한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영광을 성취한 에인은 드디어 120세가 됐으나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향수병에 걸려 있다. 신들마저 그의 귀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소호로 돌아와 참성단에 앉는다. 신의 영역에 오른 것이다.
'하늘에서 긴 은하가 내려왔다. 용의 강으로 불리는 은하가, 달보다 훨씬 밝은 그 은하가 그의 몸 위에 멈추었다. 그의 육신이 서서히 일어나 은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백성들은 그가 죽지도 않고 하늘로 올랐다고 믿었다.'(하권 366쪽)
중견 작가 윤정모의 건조하면서도 장대한 문체가 압권이거니와 전장(戰場)과 왕실을 그려내는 서사력, 그리고 청동기 시대 바빌로니아의 사회상을 면밀하게 복원하는 힘이 읽는 사람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다. 당시의 영웅들은 자의든 아니든 너나없이 잔인했다. 그들은 왕권의 존속을 위해 신격화를 택했으며, 거의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어도 항상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신세력에 의해 멸망했다. 그 세계로 윤정모가 독자를 안내한다.
입력 2005.07.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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