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일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륭원에 해마다 나무 심은 장부가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데도, 정작 심은 나무가 몇 그루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답답해진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 많은 문서를 일일이 점검하여 1권을 넘지 않게 간추려 올 것을 명했다. 다산은 물러나와 심은 시기와 장소 별로 구분하여 가로 12칸, 세로 8칸의 도표로 만들어 129,712 그루의 나무를 단 한 장의 보고서로 압축해 임금께 올렸다.

<b>무예도보통지<

내가 아는 한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최고의 편집자요, 지식 경영의 귀재다. 그는 적어도 정보를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40세에서 57세까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에 500여권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탁월한 편집 역량 때문이다.

'목민심서'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25사와 역대 문집 등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일과 관련된 사례를 가려 뽑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역대 문헌에서 추려낸 내용의 양이 우선 엄청나다. 전체 목차를 보면 부임에서 이임까지의 단계를 12항목으로 나누어 사례를 정리했다. 물론 이 엄청난 작업을 그 혼자 한 것은 아니다. 강진의 제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1차 자료를 선별해 베껴 쓰고 분류했다. 다산은 이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한 총 기획자요 편집자였다.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서 말 구슬이 단번에 한 꿰미로 꿰어졌다.

다산은 6남3녀를 낳아 4남2녀를 대부분 마마로 잃었다. 그는 이 기막힌 심정을 담아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집했다. 모두 63종의 의서(醫書)에서 천연두 관련 내용만 추려내, 예방법과 치료법을 내용별로 정리한 것이다. 분류 방식은 '목민심서'와 다를 것이 없다. 예방법과 초기 증세, 유사 증세, 진단과 처방, 속방(俗方) 등을 항목별로 정리하고, 부록에서는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했다. 병에 대해 잘 몰라 여러 자식을 속수무책으로 떠나 보낸 절통한 심정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부모들이 겪지 않게 하려는 거룩한 마음까지 담겨 있다. 다산의 다른 저술인 '경세유표' '흠흠신서'와 지리서인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 등 대부분의 저술도 모두 기존 정보들을 검색하고 재배열해서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종합하여 편집한 것들이다.

그에게서 훈련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편집자요 학자로 성장했다. 다산이 우리나라의 속담을 분류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펴내자, 이강회(李綱會)는 이를 보충해 '방언보(方言補)'를 썼다. 정약전이 미완성 필사본으로 남긴 '현산어보'는 그 후 다산이 이청(李)을 시켜 수많은 문헌 자료를 찾아 보충하여 완성했다. 엄밀히 말해 '현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의 공저다.

최근 신안군 우이도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된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에는 당시 현안이었던 배와 수레의 제도와 개선방안에 관한 분석적 논문들이 실려 있다. 논문을 쓴 이들 모두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고, 문헌을 뒤져 관련정보를 찾아내던 강진 시절의 제자들이다. 강진 시절의 모든 성과는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낸 집체 작업의 결과다.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모두 16항목으로 나눠진 백과전서적 농서(農書)다. 채소 화훼 재배에서 음식조절방법, 의약과 의례, 선비의 취미생활, 주거와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18세기적 웰빙 교과서다. 한 사람이 취급한 정보의 양치고는 너무 엄청나 경이롭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제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 하고 편집해냈다. 일본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덕무는 각종 서적에서 정보를 모아 일본입문서인 '청령국지(??國志)'를 펴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정리한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무려 148종의 국내외 무예서를 참고해서 편집한 종합무예 교과서다. 무예를 몰랐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서얼인 장용영(壯勇營) 군관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각종 무기의 운용동작과 실기자세를 도해하여 펴냈다. 도화서(圖畵署)의 화공들이 동원된 비주얼한 도판 자료는 전통 무예의 복식과 동작의 현대적 복원과 재현이 가능했을 정도로 치밀하고 꼼꼼했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제한된 정보가 독점적으로 유지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류의 전집들과 총서류의 저작들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이런 총서들은 한 질이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다. 만권루(萬卷樓)의 장서가들이 연이어 등장했고, 서적유통이 활성화되었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했다.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일상의 허접스러운 놀이나 풍습, 시정(市井)의 이야기도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편집되었다. 모든 지식이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편집된 내용의 층위도 다채로웠다. 앵무새나 비둘기, 담배와 같은 개인적인 취미의 차원부터, 천연두나 수레나 배의 제도, 무예실기 등 사회 현안이나 민생 또는 국가와 관련된 유용한 정보 분야까지 확장되어갔다. 다룬 층위는 달라도 지식과 정보를 재배열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던 편집의 원리는 한결같았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