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독일 전설에 따르면,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 두 아이와 놀고 있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반합니다. 남편을 잃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데리러 오겠다"란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쉽게 허락을 받자 그는 덴마크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것은 아이들을 살해한 그녀가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지요. '네 개의 눈'을 아이들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그는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그 참혹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는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집니다. 그러다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홀로 남은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지방의 부모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조제와 여행을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꿉니다. 갈 수 없게 됐다는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이별의 순간, 조제는 담담히 떠나보내고 츠네오는 일상적 출근이라도 하는 듯 자연스레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의 말을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에서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다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두고,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드물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예도 없을 거고요. 두려움이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츠네오 동생의 말처럼,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혼자 버텨내야 할 생(生)의 고독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만의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히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쳐야 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조제 뒷모습처럼, 종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