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도 그렇고 감독도 그렇고, 참 할 말이 많은 자리였다.
영화 '해피 엔드' 이후 5년여 만에 두 번째 작품 '사랑니'(제작 시네마서비스)를 선보이는 정지우 감독(37)과의 인터뷰는 마친 뒤에도 머리가 '띵' 할 정도로 토론 수준(?)이었다. 보수적인 우리 사회 분위기상 30세 학원 강사와 17세 고교생 제자의 밀애라는 이야기 구도가 논란의 초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언론시사회를 통해 실체를 공개한 '사랑니'는 다소 난해하지만 절묘하게 엮여 있는 다층적 구조와 몽환적 분위기 등이 화제를 모을 전망이다.
-우선 그간의 근황이 궁금하다.
▶순식간에 5년의 세월이 지나가 버렸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데 1년 정도 걸리는 편인데, '해피 엔드' 이후 곧바로 일을 시작했지만 계획했던 작업이 두세 차례 차질을 빚으면서 '사랑니'까지 오게 됐다. 그동안 실컷 놀기나 했으면 덜 억울하기나 할 텐데….(웃음)
-'사랑니'는 어떻게 빛을 보게 됐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이 계속 꼬이면서 내 스스로를 단순화시킬 필요를 느꼈다.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단순한 멜로 구도로 '사랑니'를 시작하게 됐는데, 주위에서 '너한테 잘 안 어울린다', '네가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 등의 말이 많아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쓰게 됐다. 처음과는 한 95% 정도 달라졌을까.
-'사랑니'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뭔가.
▶그런 건 따로 없다. 그저 굉장히 자기감정을 소중히 생각하는, 살아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고, 관객들이 이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단순히 즐기길 바라는 영화로는 다소(?) 복잡한 작품이다.
▶'사랑니'의 기본 구도 자체는 뻔한 통속 멜로다. 아마 백만번도 더 만들어졌을 것이고, 평범하게 간다면 '아침 드라마랑 뭐가 다르냐'는 생각에 형식에 변화를 주었다. 결과는 내 계획대로 독특한 느낌이 나왔다. 맘에 든다.
-제작 전에는 '해피 엔드'에 버금가는 베드신들을 담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스타일이 완전히 변했다. 김정은의 반대 때문이었나.
▶절~대 아니다. '해피 엔드'를 찍어 봤기 때문에 오히려 이번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해피 엔드' 때 정사신만 따로 편집한 동영상이 나돌아 (전)도연씨가 너무나 마음고생을 했고, 초반부의 강렬한 베드신 때문에 영화 후반부의 중요한 내용이나 상징들이 묻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감성을 돌려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노출신이 필요하다면 찍는다. 배우에게 눌려서 특정 장면 촬영을 포기할 만큼 자존심이 없지는 않다.
-'사랑니'에선 여고생 조인영의 정체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기자회견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 같았다.
▶내 의도를 말하는 순간, 그 장면들은 한가지 방향으로 닫혀 버리게 된다. 영화라는 건 감독의 의지와 별도로 관객들에 의해 다양하게 수용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판타지 구도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런 의도가 담겨있다. 나는 그래서 평소 DVD로 영화를 볼 때도 감독들의 코멘터리를 일부러 안 듣는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장면마다 본인이 의도하는 바는 뚜렷이 서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안 그러면 가뜩이나 복잡한 내용의 장면들을 연결해 촬영하면서 중심이 흐트러질 수도 있고, 감이 잘 안 오는 배우들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해줄 수 없다.(정 감독은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자신이 의도한 바를 상세히 설명해줬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여고생 조인영이 '다음 세상에선 이석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엔딩신이다. 영화 전체의 느낌을 압축하고 있는 장면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나.
▶아니다. 웃으시겠지만,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교(대신고) 시절 방송반에 들어갔는데, 드라마와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것이 더 재밌어 영화감독을 하게 됐다. 그래도 지금도 한 6개월 정도는 기자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제작자나 영화 관련 행정 등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는가.
▶영화감독 외에는 별 뜻이 없고, 잘하지도 못할 것 같다. 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기자나 공무원 등 간접체험을 하면서 평생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 간접 경험도 물론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한 것 아니겠는가.
◆정지우 감독의 김정은 예찬론 - "신인같은 열정, 캐릭터 밝게 살려"
한마디로 참 특이한 사람이다.
흔히 배우들의 연기 에너지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경험 등에서 폭발해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정은씨는 너무나 자기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정은씨 덕분에 확실히 캐릭터가 밝아졌고, 조인영이라는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정은씨에게 다가가 붙을 수 있었다.
정은씨의 신인같은(?) 태도도 귀감을 살 만하다. 스태프들이 촬영장에서 준비 다 마치고 나면 자신의 밴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스타가 아니라, 늘 촬영장에 붙어 있으면서 같이 고민하고 논의하고 기뻐하며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 촬영장의 다른 어린 배우들이 저절로 보고 배운 것도 많을 것이다.
(스포츠조선 신남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