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와 함께 해방 공간에서 발행된 조선, 동아, 서울, 경향 등 4대 신문의 영인본이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에서 발간됐다. 1950년 6·25 발발 때까지 5년치를 17권으로 묶었다. 8·15 직후 수많은 신문이 발행됐으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문은 이 넷뿐이다. 학계에서는 당시 신문들을 해방 공간의 복잡한 정치·사회 현실을 담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지만 소장 기관이 드문 데다가 지질(紙質)마저 열악해 자료 이용이 쉽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복간된 것은 1945년 11월 23일자부터. 1940년 8월 1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당한 신문 지령을 계승, 6924호로 출발했다. 편집 겸 발행인은 폐간 당시와 같은 방응모였다. 조선일보는 이날 오후 환국한 김구 주석 일행의 동정을 다음날 1면에 실었다. 그해 12월 1일에 복간된 동아일보는 송진우 사장과 주간 겸 편집인 설의식 체제로 출범했다. 8·15 당시 우리말로 발행된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유일했다. 매일신보는 11월 11일 중단됐고, 11월 23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됐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에 창간됐다.
미 군정이 1945년 10월 30일 공포한 군정법령 제19호는 신문 발행의 등록제를 채택, 8·15 이후 그해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40여종이 등장했다. 해방 직후 언론 상황은 열악했다. 조선·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은 모두 타블로이드 2면의 초라한 지면이었다. 인쇄시설을 따로 갖추지 못한 조선과 동아는 옛 경성일보 인쇄소에서 신문을 발간했으나 1946년 6월 인쇄공 파업으로 열흘, 한 달씩 신문을 못 내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그해 5월과 9월 각각 용지난과 철도파업으로 휴간했고, 다른 신문들도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4대 신문들은 신탁통치 반대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남북 협상,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비롯해 4·3 사건, 5·10 총선, 정부 수립 등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지면에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