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이 대세(大勢)다? 2005년말의 가요계를 보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에픽하이의 '플라이'(Fly)와 리쌍의 '내가 웃는 게 아니야'가 온·오프라인의 각종 가요순위 1~3위를 오가고 있다. 90년대초, '듀스', 'DJ DOC' 등이 자신의 곡에 일부 힙합 스타일을 차용했지만, '날 것' 정서가 살아있는 힙합퍼들이 대중 속으로 이렇게 파고 든 것은 처음이다.
◆대중적 힙합에는 '이유'가 있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춰가려는 골수 힙합 진영의 변신이 주효했다. 물론 매니아들의 반발을 무릅쓴 채였다. 직설적이고 생경한 언어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 힙합은 대중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랑, 이별 등 개인적인 감정에도 충실하다.
'플라이'는 기존 힙합 곡과 비교해, 랩보다는 감각적인 멜로디에 비중을 뒀고 다양한 전자음을 앞세웠다. DJ투컷의 설명. "리듬은 힙합이지만, 이 노래는 일렉트로니카에 가깝다." R&B적인 느낌도 묻어나는, 가녀린 여성 보컬 아민J의 미성과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도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한 몫 했다. 타블로는 "편곡이 너무 난해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 걱정을 했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했다. 멤버들은 "곡 초반부 뿅뿅 거리는 전자음 등에 대해 골수 힙합 매니아들이 시비를 걸었다"며 " '피식' 웃으며 신경쓰지 않는 듯 행동했지만 솔직히 스트레스 좀 받았다"고 했다.
'내가 웃는게 아니야' 또한 랩보다 노래에 무게중심이 실려있고 특히 30~40대까지 팬층이 넓다. 굵고 투박한 멤버들의 목소리, 오래된 느낌을 주는 멜로디 사이에 이별 후의 아픈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물론 여성 보컬(알리)의 등장도 필수다. 개리는 "질박한 가사가 성공 포인트였던 것 같다"며 "지난 2년간 우리가 실제로 겪은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힙합 문화의 저변 확대
서울 강남 등지에서 힙합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파티문화가 확산되고, 힙합 클럽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2년전. 지금은 그런 현상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힙합이 최신 문화의 상징처럼 젊은이들에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힙합 그룹의 주목도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
힙합 음반사 마스터플랜 이종현 대표는 "2년전부터 부산에도 하나 둘 힙합 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올해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힙합 클럽을 새로 연다며 오픈 행사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홍대 앞, 강남에서 최근 수유리, 신촌, 남가좌동, 방배동 등으로 힙합클럽이 확산돼 40여개가 성업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지방에도 대구, 광주, 대전, 마산, 울산 등에 계속 새로운 클럽이 생겨나고 있다.
"밑바닥부터 힙합 문화가 확산되는 것 같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그래서 '클럽 공연 다니면서도 충분히 수입을 올릴 수 있는데 왜 '오버'로 가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리쌍의 개리)
그러나, 힙합 음악을 좋아해 음반을 사는 것과 클럽을 다니는 것은 별개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현 대표는 "요즘 20대들은 예전에 나이트 클럽 가듯이 힙합 클럽을 가기도 한다"고 했다. 타블로의 말은 더 과격하다. "일부 클럽은 힙합문화를 이용해 부정하게 돈을 벌고, 실제로 힙합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데, 이는 모기 피 빨아먹는 짓이다."
◆힙합, 아이돌 스타의 '카무풀라쥬(위장술)'?
최근 힙합 뮤지션들의 TV 출연이 부쩍 늘어 대중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지난 1년간 쉬지 않고 각종 오락 프로그램을 누볐던 에픽 하이의 타블로가 시초. 그는 "힙합 뮤지션이 지하실에 숨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잘 못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솔직히 요즘 음악만 해서 편하게 웃으면서 살 수 있는 뮤지션이 얼마나 되겠냐?"고 했다. 리쌍, 드렁큰 타이거, 다이나믹 듀오 등도 최근 지상파 TV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이돌 스타들이 자신의 음악에 잇따라 힙합 스타일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HOT 출신의 장우혁은 '지지않는 태양'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래핑으로 본격 힙합 뮤지션을 연상시킨다. 올해초 새 앨범을 낸 젝키 출신 은지원은 아예 리쌍, 드렁큰 타이거 등과 교류하며 힙합퍼로 거듭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세계 팝 시장의 주류가 흑인음악으로 흘러감에 따라, 이효리, 신화 등 국내 스타들의 음악도 힙합, R&B적인 요소가 강해지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