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경도시 이반고로드. 나르바강을 사이에 두고 에스토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반고로드는 지난 1991년 에스토니아가 옛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도시 자체가 분단됐다.
러시아령 이반고로드와 에스토니아령 나르바로 나뉜 것이다. 그래서 주민 절반 이상이 이산 가족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폭설이 내리는 지난달 말 이반고로드의 국경 검문소. 차량과 도보로 국경을 넘어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차량은 500여m의 긴 줄을 이뤘다.
러시아 국경수비대원들은 적색의 러시아 여권 소지자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단한 절차를 밟게한 뒤 국경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청색의 에스토니아 여권 소지자에 대해서는 러시아인보다 2배 이상 길게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오후 들어 인파가 더욱 몰려들었지만 이런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 국경검문소의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통과한 에스토니아인 드미트리 페쉬코프(40)씨는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한다"며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인들 역시 러시아인들을 철천지 원수로 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인이지만 현재 에스토니아 국적을 취득한 에스토니아인 신분. "러시아인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에스토니아인으로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러시아도 에스토니아도 아닌 회색인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에스토니아령 국경도시 나르바의 검문소. 이곳에서는 러시아 국경검문소와 반대로 에스토니아 여권 소지자는 수월하게 국경을 통과했지만 러시아 여권 소지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아야 했다. 러시아인들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러시아인 중에는 에스토니아 국경수비대원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에스토니아인이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안드레이 발라쇼프(50)씨는 "처와 결혼을 해서 러시아 국적으로 살고 있지만 고국(에스토니아)을 방문할 때마다 비자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한심하다"고 말했다.
이반고로드와 나르바는 비록 도시 형성 시기는 달랐지만, 소련 시절 하나의 도시로 기능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편입되자 동일한 체제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면서 전혀 다른 상황을 맞았다.
50년 동안 동일한 사회·정치·문화 속에서 살던 이곳은 순식간에 이산도시가 됐고, 그 뒤로 러시아식 생활 보존과 탈(脫)러시아라는 대립 구도 속에 놓여진 것이다.
현재 러시아령 이반고로드에는 1만5000명, 에스토니아령 나르바시에는 6만명이 산다. 인구와 도시 기능 면에서 나르바시가 이반고로드를 압도한다. 나르바시 인구 중에는 2만명이 러시아인이다.
이반고로드의 러시아인들은 아직도 옛 소련시대의 강대국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에스토니아인들을 무시하고 있고, 나르바의 에스토니아인들은 에스토니아 정부의 친(親)서방 정책으로 러시아와 멀어져 가고 있다. 지난해 에스토니아는 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더욱 러시아와 소원해졌다.
그러나 삶의 일상적 욕망은 국경과 이념의 벽으로 막을 수는 없다. 이반고로드에서 만난 올가 스미르노바(67) 할머니는 에스토니아령 나르바에 살고 있지만 한 달에 두 번꼴로 이반고로드를 방문한다. 그녀는 "매달 200유로가 조금 넘는 연금을 받아 절반은 저축하고 나머지는 생필품이 저렴한 이반고로드에서 소비한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연금생활자들은 매번 1000에스토니아 크론을 가져와 2000 러시아루블(7만원)로 바꾼다. 그리고 담배와 보드카, 의약품 등 생필품을 이반고르도에서 사간다. 자동차를 몰고와 휘발유를 가득 채워 가기도 한다. 반대로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에서 옷과 고기, 그릇 등을 사오는 게 일반적이다. 양국을 오가며 서로 싼 물건을 사 서로 팔고 나눠갖는다.
에스토니아의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국적을 소유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영주권을 소유한 채 마치 이중국적자처럼 생활하고 있다. 이들의 러시아 방문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반고로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경우 유럽연합(EU) 소속의 에스토니아를 방문하려면 초청장과 150유로를 내고 30일짜리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평균 임금이 월 300달러 전후인 러시아인들에게 에스토니아의 방문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르바시에 거주하고 있는 베라 로마넨코(66) 할머니는 남편이 에스토니아 사람이어서 자동으로 에스토니아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둘은 러시아 국적으로 이반고로드에 살고 있다.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살면서도 자식들과의 결합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 됐다. 그녀는 "바로 육안에 보이는 곳에 살고 있는 자식들과 서로 남의 나라 사람처럼 살고 있다니…"라며 기막힌 운명을 탓했다.
이반고로드 안에 있는 '시네마'라는 카페. 국경을 사이에 두고 흩어진 이산가족들과 친구들이 만나 술을 마시는 곳으로 유명했다. 마치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장 같은 분위기였다. 세계 각국의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지만, 이곳 국경에서는 마치 우리들의 슬픈 얼굴을 마주한 것 같았다.
(모스크바=정병선특파원 bs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