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엇을 얻자고 힘들게 고전을 읽을까? 고전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유종호 선생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종호 선생은 고전을 통해 얻는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깨우침'이라고 말했다. 고전을 통해서 새롭고 대단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간 선인들의 삶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고전은 이전 삶을 보면서 현재 삶을 깨치기 위해서 읽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 잘 드러난다. 그리스 비극에는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여러 작품들이 남아 있지만 그 정수는 역시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이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고 있노라면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여 과거와 현재를 착각할 때가 많다.

오이디푸스는 성격이 조급하여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급한 성격 때문에 주위와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신이 만든 각본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들 하지만 실상 그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충분한 일리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질투하고 의심하며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왕' 속에는 이와 다른 오이디푸스의 면모도 있다. 테베에 역병이 돌자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해 전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붙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에게 처한 비극은 바로 자신이 그 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이다. 오이디푸스는 범인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적하여 밝혀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면모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건을 파헤치며 자신이 바로 그 범인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은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건을 은폐하기를 권하는 주위 사람의 청을 거부한다. "나는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 겠다."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는 굴욕적인 삶보다 정의로운 삶을, 비겁한 삶보다 명예로운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래서 여러 해설서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대결했다고 적고 있다.

정희모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그렇다면 우리는 비극적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찾기 위한 열정 때문에 그랬다고 평가할까, 아니면 다급한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평가할까. 어느 쪽으로 보아도 틀린 답은 아니다.

오이디푸스왕은 영웅적 면모와 인간적 면모, 이 두 가지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성격에 의해 자초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면서 우리가 운명적 삶과 주체적인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운명은 신의 몫인가?, 우리의 몫인가?).

(정희모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