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환자의 손목에다 손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맥을 짚는다. 환자 아랫배에 침도 놓는다. 진료실 책장에는 한의서가 가득하고 진료 기록에는 세로 쓰기로 한자만 잔뜩 써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의사도 환자도 모두 서양인이다. 한의사는 오스트리아 출신 라이문트 로이어(42)씨. 그가 일하는 곳은 서울 강남의 자생한방병원 '인터내셔널 클리닉'이다. 이 클리닉은 한 달 전 문을 열었다.
진료를 받으러 온 오스트리아인 에바 트루만(35)씨는 "생리통이 심해 왔다"며 예전에 침을 맞아 본 적이 있어 생소하지만은 않다고 했다. 손목이 삐어 침을 맞고 나은 아르헨티나 출신 카를로스 파스치올로(63)씨도 "정말 한결 낫다"며 밝은 표정이었다.
"내 꿈은 3년 안에 오스트리아 빈에 한의원을 여는 겁니다." 이 벽안(碧眼)의 한의사는 다짜고짜 한의학(韓醫學)도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독일에선 침 놓는 의사가 2만 명이 넘어요. 한국 전체 한의사 수가 2만 명이 안 되는데 엄청나죠? 유럽에서 이미 침술 치료 인기가 높습니다. 동양 의학에 대한 관심도 뜨겁죠. 문제는 중국 침술만 알려져 있고 한국 한의학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거침없는 한국말로 얘기를 풀어나갔다. "작년에 유럽 침술협회 회장이 하는 병원에 가봤는데 중국 풍으로 꾸며진 병원에 환자들이 바글바글하더라"며 스위스 회사에서 만든 한약까지 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약은 마지막 남은 큰 시장입니다. 침술은 이미 중국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졌고, 한의학이 외국에 진출해 승부를 걸어야 할 부분이죠."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싶어지는데, 한술 더 뜬다. "유명한 제약회사 로슈나 바이엘이 만든 한약을 역수입하지 않으려면 똑똑한 젊은 한의사들이 큰 무대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한국인 체질에 맞는 한의학을 과연 외국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로이어씨는 이메일 한 통을 열어 보였다. 이탈리아 여성 환자가 보낸 메시지는 "선생님 약을 먹고 임신해 24주째 접어들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모 기업에 고문으로 와 있는 오스트리아인 기술자(75)는 "내가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건 한약 덕분"이라며 심장병이 심해 거동조차 힘든 아내 약도 부탁했다. 주한 인도네시아 외교관 부인도 그의 환자다.
로이어씨는 "아시아, 유럽,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환자들을 봤지만, 한의학이 안 통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며 "생활 수준이 높은 외국인들이 부작용 적으면서 몸 전체를 돌보는 한의학에 대한 관심도 더 높다"고 했다. 한 번 효과를 본 환자들은 어김없이 주변 사람들을 끌고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로이어씨도 노력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꾸준히 영문 잡지 '서울'에 한의학 칼럼을 쓰고 있고 새로 오는 환자에겐 '한약 맛'부터 '한방 기본 원리'까지 한 시간씩 공을 들여 설명한다. 그의 책상에는 영어로 된 소책자도 있고 가루, 알약, 팩에 든 한약 견본도 있다. 한의학에 생소한 외국 환자들을 위한 설명 '부교재'다.
18년 한국 생활. 지난 1987년 한국에 배낭여행 왔다가 발목을 다쳐 침을 맞았는데 '어이없게도' 통증이 싹 가시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다. 8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강릉대에서 동양철학을 1년 공부한 뒤 91년 대구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사와 약사 간 한약조제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두 번이나 유급한 끝에 99년 졸업, 국내 최초의 서양인 한의사가 됐다. 한국인 아내와 아이도 둘이다.
한의학을 세계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는 '꿈'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는 그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했다.
입력 2006.08.0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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