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현피(現+Player kill)’란 단어가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현피는 이른바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사용하는 채팅용어, 외계어다. 인터넷의 진화와 더불어 인터넷 언어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지난 14일 디지털카메라 전문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에서 다투던 두 고등학생이 강남역에서 만나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던 인터넷에서부터 지켜 본 네티즌 수십명이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네티즌들은 ‘현피’를 직접 본 건 처음이라며 열광했다.

현피란 단어를 이해하려면 온라인 게임에 대해 알아야 한다. PK는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을 하다 상대방의 캐릭터를 죽이는 것. 애정을 쏟아 키운 캐릭터가 죽으면 현실에서 맞은 것과 비슷한 분노를 느낀다.

◆통신체도 진화한다, 선생님->님->님아->님하로

PK를 당하면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위해 현질을 한다. 현질이란 게임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현금을 주고 사는 것이다. 돈을 캐릭터에 발라 강해지면 날 죽인 상대에게 복수를 한다. 어떤 경우 상대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하는 경우가 있다.

가끔 게임방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건이 그런 것이다.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사장은 “PC통신 시절에도 언쟁을 하던 사람들이 직접 만나 싸운 경우가 있었다”며 “현피란 단어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 이후 등장한 단어”라고 말했다. 이번 현피는 수 많은 사람이 지켜 봤다는 점이 다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인터넷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PK를 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채팅용어는 살아 있다. 인터넷을 타고 흐르면서 뜻이 변하고 단어 자체도 바뀐다. 최초 PC통신이란 말을 만들어 낸 드림위즈 박순백 부사장은 채팅용어가 살아 있다고 말한다.

박 부사장은 최초로 ‘님’이란 호칭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처음엔 주로 숫자가 많은 PC통신 아이디를 가지고 대화를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17809 너 XXX 같은 표현이 많아지더군요.” 박 부사장은 “군번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한다. 나이차가 많은 사람들이 누구누구씨라고 부르다가 싸움이 나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로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선생님도 문제가 있었다. 연소한 사람들이 선생님이란 표현에 오히려 거북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님’이다.

님도 변하기 시작했다. ‘님아’란 표현이 2000년대 들어와 많이 쓰기기 시작했다. 주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젊은층이 쓰기 시작했다. ‘님아’가 최근에는 다시 ‘님하’로 바뀌었다. 발음나는 대로 글을 쓰는 디시인사이드 이용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인터넷에서 쓰이는 이른바 외계어를 이해하려면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글이 아니라 모양을 보라

가끔 인터넷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보인다면 그 모양을 주목해야 한다. ‘OTL’ 혹은 ‘OTZ’란 단어는 좌절했다란 뜻이다. 영어 알파벳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보면 뜻이 와 닿는다. 사람이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KIN’은 영어가 아니라 한글 ‘즐’이 옆으로 누운 모양이다. 즐도 원래 게임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즐거운 게임을 하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것이 ‘즐’ 한마디로 줄었다. 그리고 상대방을 무시할 때 사용하게 됐다. 더 이상 대꾸도 하기 싫다, 꺼지라란 의미로 변했다.

◆특정 사이트에 뿌리를 둔 단어들

새로운 외계어들은 특정 사이트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은 인터넷 신조어가 태어나는 곳은 디시인사이드다.

개벽이와 개죽이란 단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혹은 아무데서나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 혹은 개를 말한다. 디씨인사이드에서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강아지 합성 사진이 올라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개죽이란 단어가 생겼다.

디디바오(Didibao)는 사치를 풍자하는 단어다. 원래 독일 스포츠 용품 전문업체인 아디다스의 짝퉁 브랜드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호화 외제품을 선호하는 풍조를 풍자하려는 디시인사이드 이용자들은 이를 가상의 브랜드로 바꿔 놓았다. 스포츠 용품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으고, 이탈리아의 '디디바오'성을 가진 귀족이 만들었다. 전제품을 손을 만들며 전세계 0.2% 인구에 해당하는 최상류층에게만 비밀리에 공급한다. 물론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법하다(혼을 내주다), 쌔우다(하다) 같은 단어의 고향도 디시다.

최근 화제가 됐던 된장녀는 다음 아고라에서 나왔다.

‘디지툰’이란 단어는 다음 카페 샐리네조조클럽에서 나왔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손으로 그린 그림을 합성해서 만든 짧은 만화를 뜻한다. 샐리네조조클럽 운영자 샐리가 만들었다고 한다.

주루마블은 특이하게 오프라인에서 태어난 단어가 온라인에서 유행한 경우다. 인천의 한 보드게임 카페에서 부루마블 게임과 술을 결합해 주루마블 게임을 만들었다. 부루마블은 전세계 주요 도시를 사들여 이를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돈을 걷는 게임이다. 일명 ‘죽음의 주루마블’은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그려서 만든 게임판에 쓰여진 대로 ‘소주 5잔’,‘물 3잔’,‘새우깡 1봉지’를 먹는 놀이다. 지난 2월 한 그 카페 단골손님이 주루마블이란 단어를 인터넷 유머게시판에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충동구매를 하게 만드는 사람 혹은 무언가 너무 사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지름신’이란 단어는 박순백 부사장이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 ‘박순백칼럼’(drspark.net)에서 나온 단어다. 박 부사장이 추천하는 제품을 설명한 글에 이용자들이 너무 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름신’이란 이야기가 등장했다.

◆긴 이야기는 하기 싫다. 줄인 말들

인터넷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점차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스샷은 스크린 샷이 줄어든 형태다. 컴퓨터 화면을 그림파일로 저장한 것을 말한다.

요즘 방송 등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안습이다. 안구에 습기가 차다란 뜻이다. 눈물이 날 때 즉 슬프거나 안타까움, 불쌍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카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면서 ‘직찍’이란 단어도 많이 등장한다. 직접 찍은 사진이란 뜻으로 남이 찍은 사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내가 찍었다는 이야기다.

황상민(44·심리학과) 연세대 교수는 “사이버 공간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는 세상의 중심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긴 단어는 줄어 들고, 남을 높이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