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피의자는 범죄를 자백하는데, 검사가 계속 무혐의 처분하는 이상한 일도 있을까’
전직 검찰 직원 P씨는 형사 피의자나 피고인을 처벌 받게 할 목적으로 위증(모해위증)한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범죄를 자백했지만 서울동부지검과 서울고검은 “신빙성이 없다”며 각각 지난 5월과 8월 ‘혐의 없음’ 처분했다.
검찰과 법원이 P씨의 자백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P씨의 위증을 인정할 경우 위증으로 인해 형사 처벌을 받은 다른 형사 피고인에 대한 수사와 재판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P씨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 서울동부지검과 서울고검의 검사는 각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P씨의 진술이 필요에 따라 바뀌어 P씨의 위증 자백을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P씨가 위증죄로 고소된 사건은 지난달 말 재항고돼 대검에서 조사 중이다.
“위증으로 흑백 뒤바뀌었다”
P씨가 사건에 휘말린 계기는 고향 친구 정모(57)씨와 최모(여·50)씨 및 최씨의 사업파트너 김모(67)씨간 사업 이익금 분배 다툼과 법적 분쟁에 끼어들면서 부터다. 친구 정씨는 2003년 경매 대상인 서울 송파구 S빌딩의 152억원짜리 근저당권을 싸게 인수한 뒤 나중에 건물이 낙찰돼 경락대금이 나오면 이 돈에서 근저당가액의 회수를 통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제안, 최씨를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2003년 6월24일 152억원짜리 근저당권을 100억원에 낙찰받은 뒤 건물이 경매로 팔리자 건물 낙찰대금중 근저당권 가액 152억원을 받아 5개월만에 투자금과의 차액 52억여원을 챙기게 됐다.
문제는 이익금 52억원의 배분을 둘러싸고 사업제안 및 정보제공자인 정씨와 투자자인 최·김씨 간에 고소·고발 및 민사분쟁이 시작된면서 불거졌다. 정씨와 최·김씨 간의 논의를 지켜보고 법무사로서 이들 사이의 이익금 배분 약정서 작성에 관여한 P씨는 법적 다툼의 중요한 증인으로 등장했다. 최씨와 김씨는 이해관계가 같은 처지여서 P씨의 진술과 증언이 결정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김씨와 정씨간 법적 다툼 과정에서 P씨는 최씨로부터 “유리하게 도와주면 상당한 대가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최씨의 자술서와 탄원서를 써주고 법정에서 최씨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정씨는 1심에서 사기미수 및 신용훼손 강요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적 분쟁의 쟁점은 이익금을 똑같이 나누기로 한 약정서가 자발적 동의에 따라 작성된 것인지, 강요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P씨는 검찰 수사와 재판에서 “약정서가 강요에 의해 작성돼 무효다”는 최씨측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P씨는 그 대가로 3차례에 걸쳐 최씨에게서 2억원을 받았다.
P씨는 지난해 7월 정씨의 항소심 7차공판에서야 뒤늦게 “약정서는 내 입회아래 자발적 동의하에 작성됐다”며 “그 전에는 위증을 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진술이 번복돼 신빙성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정씨는 이익금 배분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올해3월 대법원에서도 2년형이 확정돼 7개월째 수감 중이다.
“위증을 했다”는 P씨의 주장이 항소심에서 받아들여졌다면 정씨에 대한 유무죄 판단은 달라질 수 있었다. 정씨 수사 검사는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양측(정씨와 최씨측)이 자기 입장에서만 진술을 해 최대한 사회통념에 맞춰 판단을 했으나 그랬을(정씨가 억울하게 당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말했다. 정씨는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최씨와 김씨가 이익금을 나눠 주지 않으려고 P씨와 짰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최씨는 “대법원에서 정씨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나와 다 끝난 사안이다”며 “P씨가 나에게서 10억원이 넘는 돈을 받으려다 여의치 않자 진술을 편의대로 바꾼 것이다”고 반박했다. 정씨의 항소심 판사는 “정씨에 대한 유죄 판단에는 변함이 없으며, 사건의 실체가 뒤집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검찰 법원도 진실 외면?
P씨가 정씨의 항소심 재판에서 증언을 번복한 직후인 지난해 9월 검찰은 P씨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변호사가 아닌 P씨가 2억원을 받고 최씨의 자술서와 탄원서, 사건 관련 소명자료 등을 써줘 사실상 변호사일을 해준 혐의로 기소했으나 P씨는 재판에서 2억원이 ‘위증의 대가’라고 주장했다. P씨도 지난 9월 대법원에서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P씨는 기자와 면회에서 “변호사 비용으로도 2억원이면 큰 돈이고 당시 거물급들이 최씨의 변호사를 맡고 있었는데, 왜 법무사인 나에게 법률대리를 맡기겠느냐”며 “2억원에는 위증의 대가가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P씨는 “나를 위증죄로 기소할 경우 정씨에 대한 검찰 수사와 유죄 판결이 뒤집어질 상황이어서 위증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했다.
당시 P씨 수사검사는 “수사할 때는 위증했다는 얘기가 없었다”고 했고, P씨의 1심 판사는 “P씨가 재판에서 위증했다고 주장한 건 맞지만 검사가 위증 혐의로 기소한 게 아니어서 위증 여부는 아예 판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P씨의 2심 판사는 “P씨가 받은 돈 중에 ‘유리한 진술과 증언’을 해 주는 대가가 포함돼 있다 할 지라도 변호사법 위반 성립에는 무리가 없다”면서 “P씨가 받은 돈이 위증의 대가인지 여부는 따로 판단할 필요도 없지만, 사건을 전체적으로 보면 P씨가 위증했다고 보기 어렵게 돼 있다”고 말했다.
최씨에게 유리한 P씨의 진술과 증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씨는 지난해 말 P씨와 최씨 등을 모해위증 혐의로 서울동부지검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P씨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전부 무혐의 처분했다. P씨는 “진술을 번복하긴 했지만 검찰과 법원이 진실에 귀를 틀어막았다”고 말했다.
검사들의 P씨 무혐의 처분 근거는 “정씨에 대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으니 그 재판에서 ‘위증했다’는 P씨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P씨가 자신의 위증 때문에 정씨에 대해 검찰 수사와 재판이 왜곡돼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주장한 것인데, 검찰은 이미 정씨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나왔으니 위증이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는 모순된 논리를 내세운 셈이다.
최씨와 P씨 등에 대한 모해위증 혐의에 대한 대검의 재조사와 함께 P씨에게 2억원 외에 지난해 5월 추가로 1억원을 전달하려던 최씨의 딸 김모(34)씨를 정씨가 위증 교사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서울동부지검이 현재 수사 중이어서 사건의 실체가 뒤바뀔지 여부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