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기 수리기사인 브루노는 트럭을 몰고 동서독 국경지방의 오래되고 낡은 영화관들을 오간다. 어느 날 그는 폴크스바겐을 타고 맹렬히 강으로 돌진하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로베르토란 이름의 이 사내는 아내와의 불화 끝에 집을 나와 방황하는 중이다. 브루노의 트럭에 몸을 싣게 된 그는 국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느리고 긴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197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독일감독 빔 벤더스(Wenders)의 대표작이자 영화사상 최고의 로드무비 가운데 한 편으로 꼽힌다. 이 작품 이후에도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나 ‘리스본 스토리’처럼 기억에 남을 만한 로드무비를 내놓았지만 그 어느 것도 ‘시간의 흐름 속으로’에 필적할 만큼의 성취를 보여주진 못했다.

우리는 흔히 길을 따라가는 여정을 삶에 비유한다. 그리고 로드무비는 종종 그러한 비유의 영화적 형상화로 간주된다. 또 영화 속에서 길 위의 삶은 도피 내지는 탈주, 탐색, 구원이나 좌절 등의 단어로 요약되는 모험의 여정으로 묘사되곤 한다. 벤더스의 이 빼어난 로드무비의 최고의 미덕은 스스로를 또 하나의 삶의 비유로서 제시하기보다는 기꺼이 모호함을 감수하려는 그 태도에 있다.

과거를 회복하거나 보상하고자 하는 낭만적 시도의 허망함, 인간적 유대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영원히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 같은 망설임 등의 감정이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으며 간헐적인 유머는 언제나 음울함으로 얼룩지곤 한다. 촬영감독 로비 뮐러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전후 분단시기 독일의 내면적 공허와 황폐함을 반영하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라 할 만하다.

적막한 가운데 통렬한 아픔을 전달하는 후반부의 밤 장면에서 로베르토는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를 내뱉는다.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지화했군.” 그들만의 탄식이랴.

원제 : ‘Im Lauf der Zeit’ 176분 ★★★★★ (5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