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적자원부와 전경련의 요청을 받아 ‘차세대 경제 교과서 모델’을 만든 전택수(田宅秀·한국경제교육학회장·한국학중앙연구소 교수). 그는 16일 인터뷰 장소에 미국의 고교 경제 교과서 한 권을 들고 왔다. 민노총과 전교조가 ‘친(親)기업적’ ‘반(反)노동자적’이라며 반발하고, 교육부가 돌연 인쇄·배포 계획을 중단하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학자들이 순수하게 만든 교과서인데 정치적 공세를 하고, 교육부가 그에 떠밀리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도중 집필에 참고 자료로 활용한 미국 교과서 얘기를 수차례 했다. 그는 “경제 교과서에 노동계가 주장하는 재벌의 폐해를 다뤄야 한다면 노동계의 불법 파업 문제도 다뤄야 할 것”이라면서 “일부 노동계의 주장은 경제 교과서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전경련 지원으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친(親)기업적이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집필자 10명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전경련에서 연구비를 받았다고 해서 전경련의 주장을 따라 집필했다고 하면 학자들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집필자들은 어떻게 선발됐나.

"학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모했다. 교과서를 어떻게 집필하겠다는 제안서를 받은 뒤 그를 토대로 선발했다. 특별히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선발된 학자들은 집필 전에 하루 합숙을 하면서 큰 방향을 논의했고, 그 후 분야별로 나눠 각자 집필했다. 그 과정에 이런 내용을 넣어 달라 마라 하는 식의 외부 요청이나 간섭은 없었다."

―기존 경제 교과서 어디가 문제이길래 이 '모델'을 만들게 됐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너무 강조하고, 기업활동에서 발생했던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내용이 다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령 일부 경제 교과서는 재벌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한다'는 식의 예를 들었다. 이것은 한국적인 토양에서 나타나는 특수성이지 시장경제 체제 자체의 문제점은 아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경제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만약 기업에 대한 이런 부정적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노동계의 불법 파업 문제도 함께 거론돼야 한다."

―이번 일에 대한 기업 쪽의 반응은 어떠한가.

"격려가 많이 오고 있다. 기존 교과서는 사회환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데 비해 이번 교과서 모델은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라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인 것 같다."

―민노총이나 전교조는 '노조가 있는 기업은 고용을 감소시키는 선택을 한다'는 내용에 대해 반(反)노동적이라고 비판한다.

"확대해석이고 민감한 반응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장경제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수요법칙을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물건 값이 비싸면 수요자는 그것을 적게 쓰려고 한다는 것이 수요법칙이다. 물론 우리는 기업에 내부적인 경영혁신을 해 추가 비용을 흡수할 것이지 왜 고용을 줄이느냐고 힐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업이 선택할 문제이다."

―'정부 개입이 개인이나 사회의 이익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부분도 문제 삼는데.

"먼저 이는 부주의해서 나오는 비판이다. 책 내용 중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민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면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들어 있다. 그런데 이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비판만 하는 것이다. 또 순수한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편견도 있다. 순수한 시장경제 체제는 이기심(개인적 이윤추구를 뜻함)에 의해 움직인다. 개인 간의 거래를 중시하는 것이 시장경제인데, (요즘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처럼) 정부가 개입했을 때 개인 간의 거래가 오히려 억제되고 결과적으로 개인의 이익이 박탈되는 양상이 빚어진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 중심적 경제정책을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너무 억울하다. 교과서에는 '박정희'라는 말이 아예 없다. 단지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정부가 기업활동을 장려하고, 기업과 개인들이 열심히 노력했으며 그 결과 개인들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에 속한다는 결론을 유도하고자 쓴 것이다. 여기에 독재, 재벌의 횡포, 정경유착 등을 포함시키기엔 적절치 않다. 그것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경제외적 속성이고, 다른 교과서에서 다루면 된다."

―경제 교과서는 어떤 식으로 집필되어야 하나.

"일상의 경제생활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설명하는 원리를 담아야 한다. 미국에서도 경제학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 때문에 공급, 수요, 가격, 기회비용 등 20개 정도의 기본개념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미국 교과서에도 기업의 부정부패라는 주제는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은 시장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특수성의 문제다."

―경제 교육에서도 한국사회와 정치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동의할 수 없다. 정치는 정치, 사회는 사회로 나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다 통합해 가르친다는 것은 얼핏 그럴듯하지만 학생들은 혼란스러워지고 판단력이 오히려 흐려진다. 고교생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 실제 벌어지는 경제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 경제원리를 가르치면 된다. 한국사회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은 성인이 돼 판단하고 해결할 일이다."

―앞으로 보수와 진보 진영이 함께 참여하고 합의해서 만든 교과서가 나올 수 있을까.

"글쎄…. 힘들 것이다. 진보 진영은 무조건 시장을 불신하고 (재벌의 문어발 정책 같은) 시장경제 체제의 주변적인 내용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결국은 각자가 (교과서를) 만들어서 학생과 학교가 선택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과서도 하나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교조가 압력을 행사하면 시장이 왜곡되겠지만…."

전택수 회장은

전택수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은 4년 전 한 출판사의 검인정 경제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당시 그는 권위주의 체제 붕괴 이후 한국 경제의 침체를 기술했다. 내용은 경제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개인과 노조가 욕구를 거침없이 분출하고 기업은 무한정 이윤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시장경제체제가 합리적인 이윤추구를 바탕으로 하지만 경제제도가 갖춰지지 않으면 비합리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었다. 당시 경제계로부터는 "반(反)기업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교과서를 집필했다. 전 회장은 "내 입장은 그대로인데 이제 나를 반(反)노동·친(親)기업 인사로 부른다"며 씁쓸해했다.

한국경제교육학회에는 200명 정도의 사범대 사회교육과 혹은 경제학과 교수들이 참여 중이다. 전 회장은 1981년 서울대 사범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경제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전경련의 요청을 받아 '차세대 경제 교과서 모델'을 만든 전택수(한국 경제 교육학회장, 한국학 중앙 연구소 교수). 그는 민노총과 전교조의 비판을 반박하면서 "아이들에게 시장경제체제의 기본개념을 가르치는 교과서에 정치 논리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허영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