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기’의 좌파 학계가 요동치고 있다. 작년 말 뜨거웠던 좌·우 이념 논쟁은 일단 소강상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대선 정국의 주도권을 놓친 범(汎)여권이 수세에 몰리면서 좌파 학계 내부의 논쟁이 불붙었다. 그들 대부분은 ‘실패한 노무현 정권’과 일정한 선을 긋고 있으며,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스스로의 위기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정권과 선 긋기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적 지지 기반이었던 좌파 학계의 대거 이반 현상은 2005년의 대연정 제안과 작년 중반 5·31 지방선거에서의 여당 참패, 한미 FTA 추진이 커다란 계기가 됐다. "현 정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이제 '포스트 참여정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며 많은 학자들이 '지지 철회'를 표명하고 나섰다. 이들의 이반 원인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얻었음에도, 진짜 해결해야 할 민주개혁엔 무능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에만 유능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한 학계 인사의 지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좌파'의 입장으로선 동조하기 어려운 정책들이 결정적인 균열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탄핵”
최근의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의 발언이다. 진보 진영의 대표 학자이면서, 그러나 민족주의 진영과는 거리를 두어온 최 교수는 작년 9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사실상 정치적 탄핵을 받았다”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지지했던 세력과 노 정부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 여당은 앞선 정부의 여당 구조에서 주변에 있었던 그룹이 중심이 됐다”, “현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비전, 아이디어를 가졌던 리더나 정치세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를 전체 좌파 진영의 비주류로 설정하려는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최 교수는 또 “민주화 운동세력의 무능력, 민주화 세력임을 자임하는 정치인들의 무능력이 오늘날 한미 FTA를 낳고, 북핵 위기를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다” “위기의 원인은 (집권 이전의) 운동이 (집권 이후의) 정당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실패하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으면 교체되는 게 당연하다. 한나라당이라고 안 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했다.
◆좌파 ‘거물’들의 논쟁
‘정권을 한나라당에 넘겨 줄 수도 있다’는 최 교수의 발언에 좌파 학계의 두 ‘간판급’ 학자들이 나섰다.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와 ‘진보평론’ 공동대표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가 인터넷 매체 ‘레디앙’을 통해 논쟁에 불을 붙인 것. 조희연 교수는 “노 정부가 제도정치를 통해 갈등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세력의 비타협성이 문제이며, 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더 진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의 집권은 ‘신보수주의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진보세력의 패배의 결과로서 출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손호철 교수는 “사회적 양극화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민중이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의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연합·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 결과 정권이 넘어가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실패라는 ‘진단’은 같으면서도 그 ‘병인(病因)’과 ‘처방’의 분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진사회 건설’ ‘중도 선언’까지
‘진보 진영’의 대표적 계간지인 ‘창작과비평’의 주간 백영서 연세대 교수(역사학)는 ‘창작과비평’ 봄호 권두언을 통해 “이번 선거에서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거의 당연시하는 듯한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은 자못 우려스럽다”며 최 교수 쪽을 비판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미래전략의 요체는 ‘한반도 선진사회’”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뉴라이트 진영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의 ‘선진화론’을 연상케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진보 진영’의 학자로 강정구 교수를 옹호해 왔던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는 ‘황해문화’ 봄호의 기고문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의 급진적 진정성이나 우파의 경직된 정체성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통합적 해결력을 보이는 강한 중도”라며 중도(中道)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논쟁은 노무현 정부로부터의 ‘이반’ 뒤 새로운 방향을 잡기 위한 필연적인 수순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파 진영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는 “그들로서는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일관된 입장을 취하는 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할 건설적인 논쟁이 아니라 여전히 공리공론에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