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도쿄특파원

‘모에(萌え)’라는 일본 하위문화의 새 흐름을 소개하려다 집어치운 것이 재작년 일이다. 현장에 가보곤 “불황이 10년이면 이런 짓도 하는군” 하면서 혀를 차고 말았다. 가정부 복장을 한 여종업원이 “주인님” 어쩌구 하는 카페나, 여성 가슴을 한껏 과장한 인형들이나, 딱 애들의 ‘변태 장난’이었다. ‘모에’란 단어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현장이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였다. ‘워크맨’ 시대부터 한국 관광객에게도 널리 알려진 커다란 전자 상점가다. 이런 곳이 ‘모에’ 발상지가 된 것은 ‘오타쿠’란 집단과 연관이 있다. 일본 국어사전은 ‘오타쿠(御宅)’를 ‘특정 분야만 관심이 있고 상식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악평에 가깝다. 이들이 즐기는 ‘특정 분야’란 주로 만화와 컴퓨터를 말한다. 컴퓨터 매장이 많은 아키하바라에 ‘오타쿠’가 모이다보니 만화 가게도 함께 늘었다. 불황으로 문닫은 전자 상점을 속속 잠식해 “일본의 퇴보”를 상징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오타쿠가 형성되고, 아키하바라가 변질되고, ‘모에’ 현상이 유행하기까지 대략 15년 정도 걸리지 않았나 싶다. 사이코 취급 받던 ‘오타쿠’는 300만명 가까이 늘어났다. 일본 국어사전의 불쾌한 정의대로 ‘오타쿠-아키하바라-모에’ 현상을 2000년대 초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별로 없었다. 이런 시각을 확 바꿔놓은 것이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였다. 뉴욕에서 6800만엔에 팔려나간 작품 ‘Miss Ko²’는 바로 ‘모에’를 상징하는 가정부 차림의 소녀 인형이었다.

무라카미 스스로 만화광 ‘오타쿠’ 출신이다. 그러다 대학을 두 번 낙방했다. 무라카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인물도 애니메이션 원화(原畵) 제작자 가네다 요시노리(金田伊功)다. 이름은 몰라도 그가 원화를 제작한 애니메이션 한 편쯤은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우주전함 야마토’ ‘은하철도 999’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메트로폴리스’ 등등. 오타쿠적 모티브로 성장한 무라카미는 지금 세계적 미술가다. 물론 ‘모에’ 문화 역시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모에’란 말에서 사용되는 ‘萌(맹)’ 자는 ‘싹트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주로 소녀)에게 느끼는 ‘귀엽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말한다고 한다. 이런 유아기적 감정이 세계적 미술로 변신하기까지 일본 정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타쿠’가 낮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푼돈이 밑천의 전부다. 이 돈이 ‘아키하바라’라는 거대 시장과, ‘모에’라는 만만치 않은 ‘일류(日流)의 싹(萌)’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속을 파고드는 일본 문화는 소설이나 드라마, 만화만이 아니다. ‘콤데갸르송’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를 모르고 세계 패션을 말해선 안 되고, ‘안도 다다오’ ‘반 시게루’ ‘사나아’를 모르고 세계 건축을 말해선 안 된다. 이들의 기세는 흡사 1980년대 세계 가전을 석권한 ‘소니’를 연상시킨다. 물론 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뒤를 받쳐준 것은 상위문화의 수많은 ‘오타쿠’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 불황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이런 말에 익숙해진 우리는 정말로 그 시간을 일본의 공백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백이 아니라 우리가 일본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아키하바라의 ‘모에’ 현상은 그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