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 가득한 요즘, 해야 할 일은 잔뜩 밀려있는데 1시간 뒤, 내일, 다음부터 하자며 전보다 더 게을러진 자신을 ‘봄이라서 그럴 거야~’하고 으레 합리화 시키고 있지 않은가?
봄이라서 게을러진다는 법은 없다. 오늘도 할 일을 뒤로 미루며 게으름을 어떻게든 합리화 시키고 있다면, ‘병적인 게으름’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게으름도 ‘게으름 나름’
현대인들은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게으름’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로 여겨져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게으름 나름이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윤세창 교수는 “게으름으로 인해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성이 게으른 것으로만 생각하고, 치료 받아야 할 게으름을 방치한 채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마음의 병에서 나오는 게으름은 치료받아야 마땅하다”고 처방한다.
윤 교수에 따르면 생활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상실하며,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줄어든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선뜻 병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 형태의 우울증들에서도 게으름이 나타날 수 있다. 기분부전증 환자들은 자살을 생각할 만큼 우울증상이 심하지는 않으나 만성적으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자신감이 없고, 뭔가 결정하기를 어려워한다.
때때로 자기가 하는 일에는 매우 열중해 일벌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게으르고 생산성이 떨어져 있으며, 전체적인 삶의 질이 낮다.
정신병의 음성증상이 있을 때도 병적인 게으름이 나타난다. 정신분열병의 급성기에는 환각이나 망상, 이상한 언행과 같은 양성증상이 주로 나타나는 반면, 만성기에는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하며,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음성증상이 두드러진다는 것.
윤 교수는 “단순형 정신분열병이라고 해서 아예 급성기 양성증상이 없이 음성증상부터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며 “음성증상이 주된 증상인 경우 이를 단순한 게으름으로 생각해 병원을 찾지 않거나 치료를 중단하기 쉽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신병으로 나타나는 게으름은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병이 진행되어 사회적인 기능을 점점 더 손실하게 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또한 정서 상태와 대인관계가 불안정하고, 충동조절을 잘 못하는 성격장애 환자들에게서도 병적인 게으름이 나타난다. 이들은 우울증에 쉽게 빠지고, 게으르거나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쉽다.
이에 윤 교수는 “게으름이 지나치다 싶으면 혹시 치료 가능한 마음의 병 때문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며 “이런 양상으로 나타나는 게으름은 치료 받아야 할 병이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게으름’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병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 누구나가 게으름의 증상을 지니고 있으며, 휴식을 위해서라도 게으름은 필수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게으름이 병적이란 것일까?
◇삶에 방향성 없는 게으름은 ‘병적’
이는 하릴 없이 빈둥거리기만 한 게으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나은 삶 정신과 문요한 원장은 “게으름은 일종의 ‘선택 장애’ 혹은 ‘선택 회피 증후군’이다”며 “게으름을 능동적으로 선택한 경우라면 게으름으로 판명할 것이 아니라 여유이다”고 해석한다.
문 원장에 따르면 시작의 지연, 약속 어기기, 꾸물거리기, 폐인처럼 은둔하기, 눈치 보기, 막판에 서두르기 등은 다양한 양상을 가지지만 진행과정은 동일한 게으름에 해당하며, 이는 마지못해 선택했거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
문 원장은 이어 “게으른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다음에’ ‘내일부터’ 등을 들 수 있다”며 “이는 삶을 파괴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고 강조한다.
이로써 분초를 아껴가며 일하고 퇴근 후에도 학원 등에서 실력 쌓기에 매진하는 사람도 게으름에 젖은 유형일 수 있다. 게으름은 삶에 방향성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
따라서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고, 중요한 일은 미룬 채 사소한 일에 매달리고, 실속 없이 늘 바쁘고, 능력은 있지만 도전하지 않는 사람도 게으른 사람이다.
게으름도 단계적으로 진전된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지각하기→ 선택을 미루거나 회피하기→ 딴 짓을 하거나 늑장부리기→ 자신의 행위 합리화하기 단계가 그것. 문 원장은 “이러한 단계를 걸쳐 병이 깊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에 따라 ‘병적 게으름’은 게으름에 대항해 자기방어를 포기했다는 점, 그리고 게으름의 피해가 삶의 특정 영역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게으름과 구분된다.
문 원장은 “이러한 병적 게으름은 당연히 회복하는 데에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며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가 무척 어렵다”며 “자신의 게으름을 파악, 진단해 올바른 삶을 가꿔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병적 게으름’ 진단표
자신의 상태를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O, 아니면 X 표 체크
(4개 이상 : 병적 게으름을 의심. 6개 이상 : 병적 게으름)
1. 지난 6개월 동안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2. "넌 너무 게을러!"라는 지적을 종종 받고 있다.
3. "난 게을러서 못 해!"라며 맡겨진 일이나 할 일을 자주 피하고 있다.
4. 게으름이 삶 전체의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5. 삶의 지향성이나 목표가 없다.
6. 즉각적 쾌락을 주는 대상(술, 게임, 쇼핑, 약물 등)에 점차 중독되어간다.
7. 난 무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8.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했다.
9. 대인관계를 피하고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10. 내 인생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